文益漸의 생애와 木綿 傳來 事蹟의 검토


文致昌  辯 「家狀」의 내용을 중심으로 –김해영교수 (경상대학교)

 

    머리 말
    1. 문치창의 가장과 삼우당실기        

       1) 문치창의 가장

       2) 家狀의 발견과 『三憂堂責記』의 編刊
    2. 가장의 발견과 상우당실기의 편간


    3. 가장에 나타난 문익점의 행적      

       1) 출생과 생장   

       2) 원 사신과 덕흥군 사건    

       3) 재원 행적과 목면종의 전래
    맺음 말

 

 

머리말
문익점은 경상도 강성(현 산청군 단성) 출신으로 고려 말 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목면 종자를 가져와 이를 전파시킨 공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가져온 10 餘枚의 목면 종자가 그의 고향에서 기적적으로 재배에 성공하게 됨으로서 이후 목면 재배법은 같은 시기에 새로이 습득하게 된 직조 기술과 함께 온 나라에 전파되었다.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진 목면업은 농가 경제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고 의생활을 비롯해서 생활 문화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아울러 조선왕조의 경제 정책과 수취 양식, 유통 질서 등 국가 경제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목면 종자의 전래가 초래한 여러 국가적 공헌은 이후 문익점에게 그 공적이 돌아가게 되었다 목면의 보급에 따른 공적에 대해서 일찍이 秋江 南孝溫은, "한 집안으로 말미암아 고을이 혜택을 입게되고, 한 고을로 말미암아 온 나라가 혜택을 입게 되었으며, 만세토록 천지와 더불어 무궁히 그 혜택이 끼칠 것이다‥‥
그 깊고도 높은 공적을 무어라 이름할 수 없다"라고 극찬하기도 하였다.  그는 후세에 '木綿公'이라는 별칭을 얻었을 만큼 목면의 전래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공적임은 말할 나위 없다.

한편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살펴보면, 그는 道學의 창명과 덕행 및 충절 때문으로도 당대 및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 평가되었다. 金宗直을 비롯해서 鄭汝昌, 金宏弼, 曺植, 李滉, 宋時烈 등한 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들이 한결같이 그가 끼친 '衣被生民之功'을 찬양하는 한편, 그의 道學과 德行 忠節을 더불어 칭송하는 시문을 남기고 있는 경우가 그러하다 1)

문익점의 공적은 후대에 이를수록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영조는 그의 후손에 대해서 거듭되는 특전을 내리면서 "우리 나라가 3백년 전 이래 衣冠 文物이 빛나게 일신된 것은 실로 江城君이 목면씨를 가져옴에서 비롯된 것이니 공이 강성군 보다 클 수 없고 덕이 강성군 보다 훌륭할 수는 없다"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에 대해서는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관찬 기록과 남평문씨 문중에서 간행한 삼우당실기를 통해서 접근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기록 간에는 그의 생졸 연대와 在元 기간, 그리고 목면 종자의 전래 및 재배 시기와 관련되는 사실 관계의 기술에 있어 차이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해서 그의 재원시 행적과 정치적으로 미묘한 시기에 있어서 그가 취한 행동에 대해 『고려사』열전과 『삼우당실기』는 서로 상반되는 기술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주로 남평문씨 문중에서 발행한 『삼우당실기가 참고되고 있다. 필자는 『삼우당실기』를 중심으로 문익점의 행적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문익점의 증손 文致昌이 세조 10년(1464)에 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家狀」을 주목하게 되었다. 2)
이 「家狀」은 무슨 까닭에서인지 오랫동안 세상에 전해지지 않다가 1808년 남평문씨 족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다.

  본고는 문치창의 「家狀」을 중심으로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에서 몇 가지 의문되는부분에 대해 관련 자료를 비교 검토한 글이다 그의 생졸 년월과 재원시 행적 및그가 목면 종자를 전래한 시기 등이 본 연구의 중요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문치창이 「家狀」을 찬술(1464년 찬)하게 된 배경과 「家狀」 발견(1808년 발견)을 전후로 해서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기록에 나타나는 변모 등애 대해서 밝히고자 하였다. 3)

 

1. 문치창의 가장과 삼우당 실기
  
1) 문치창의 가장

가장(家狀)은 문익점의 증손인 문치창이 세조 10년(1464)에 문익점의 행적을 기록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가 이를 기록으로 남기게 된 것은 이 보다 앞서 세조 7년4)-론1) 겨울 선조의 묘소를 살피기 위해 三從兄과 같이 서울에서 丹城을 찾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4)
그는 이 때 宗家에 들러 선대에 남긴 遣蹟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당시 그가 종가에서 본 것은 병오년(1426)의 화재로 타고 남은 나머지 가운데 일부로서, 그나마 당시 화재를 면한 것도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대로 방치해서는 세월이 흐르면 더욱 없어질 것으로 판단하여 주위에서 선조의 행적과 관련있는 자료들을 찾아 모으고, 그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참고해서 이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한다. 5)

  따라서 家狀의 기록 내용 가운데는 문치창 자신의 판단과 추정이 개입됨으로서문익점의 행적에 대해 사실 관계를 잘못 기록할 수가 있다고 본다. 물론 문치창은 문익점의 증손이기에 증조 문익점의 행적과 관련해서 집안에 전승되어 오는 내용을 익히 알고 있었을 터이지만 그가 이 때 단성을 방문한 것은 일찍이 전에 없었던 일이기도 하였다. 삼우당실기에는 세조 7년(1461) 당시 문치창이 단성에 이르러선조 삼우당의 유적지를 보면서 감회에 젖어 쓴 詩와 함께 詩序가 남아 있는데,6)그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신사년(1461) 겨울 나는 서울로부터 龜城에 이르러7) 도중에 선조께서 사신 고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말하기를, "저 나무는 우리들의 선생께서 심으신 것이고, 저 언덕 저 흐르는 강은 또한 우리의 선생께서 낚시질하시던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고삐를 놓핀 방황하여 눈을 들어 산하를 둘러보니 오래된 나무는 가지가 적어 엉성하고 찬물 흐르는 강은 눈을 내뿜는 듯하여 나를 위해서 감회를 돕는 것 같았다. 8)
그리고 고을 사람들은 다 선조를 존경하여 우러러 칭송하기를, "선생의 공은 다만 한 고을이 힘입은 바가 아니라, 한 나라가 힘입은 바이고, 다만 한나라가 힘입은 바일 뿐만 아니라 만세가 힘입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9) 선조에 대한 이러한 칭송은 문치창으로 하여금 증조의 행적을 기록으로 정리, 보존해야겠다는 결심을 자극하였고, 그 결과물이 바로 오늘날 『삼우당실기』 속에 실려있는 「家狀」이라고 하겠다. 

문치창은 문익점의 증손으로서, 문익점의 장자 중용(中庸)의 손자이고, 부는 승손(承孫)이다.
祖 中庸은 문익점의 목면 전래의 공적에 대한 음덕으로 태종조에 사헌부감찰의 벼슬에 특배되었고,10)
그 뒤 사간원 정언의 벼슬을 거쳤음이 확인되는 만큼,11) 태종조에 관도에 오른 이후로는 상당 기간 고향을 떠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치창의 父 承孫도, 『남평문씨족보』에 따르면 蔭으로 관직에 나아가 戶曺佐郎에 이르렀으며 문치창 역시 음으로 벼슬에 나아가 감찰의 벼슬을 거쳤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 만큼 문치창이 家狀을 짓게 된 계기가 된 세조 7년의 단성 방문은 그로서는 전에 없었던 경험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家狀」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모르나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순조8년(1808)에 남평문씨 족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당시 海島에 살고 있는 문익점의 후손으로부터 뜻밖에 입수한 것이라고 한다. 12)
현재 文益漸이 남긴 遺文을 포함해서 그의 생애와 행적에 관한 자료를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는 『삼우당실기』는 그 초간 연대가 순조 19년(1819년)인데, 이 초간본 삼우당실기의 발행은 바로「家狀」의 발견이 이를 촉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우당실기』는 문익점의 제 18세손 文桂恒의 주도로 편찬 간행되었는데, 『삼우당실기』를 편찬함에 있어서 가장의 발견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문계항의 다음 설명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삼우선생이 내게는 17대조이시다, 돌아가신지 400여년에 세대가 綿遠하고 宗祠屢乏하였다. 선생이 지으신 詩文과 疏章이 적지 않았겠지만 처음에는 집안의 화재로 잃고 다음에는 병화로 소진되어 탕연히 전해지는 것이 없었고 중간에 수록한 것으로 단지 '家傳' 한 본이 있었으니 대개 天順 甲申에 감찰공 致昌이 지은 것이나 이 또한 잃어버렸다 이후 전하는 것은 특별히 각 집안에서 기록한 약간의 私乘 뿐이었다. 지난 병술년에 단성의 사림 朴思微가 찬한 행적기 한 권은 道川院蹟으로 인해 만든 것이고 또 무신년에 冠山에 사는 宗丈 泳光 씨가 간행한 공신록은 여러 집안에 소장된 것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 도답襲巾衍한 문자일 따름이어서 大義가 궐약하고 錯亂된 것이 파다하며 또 년월과 시대가 상호 거릇되어 뒷날 의혹을 일으킬 곳이 심하였다. 지난 무진 여름에 다행이 족보를 간행하는 일로 인해서 이른바 「家傳」 한 卷을 얻었으니 바로 天順 8년에 遺集한 것이었다. 나는 곧 손을 씻고 책을 펼치니 훤하게 마음의 눈이 열리었다 이로부터 어리석고 식견이 좁은 줄도 모르고 외람된 생각을 품기를, 지금까지 선조의 행적에 관해서 잘못 되었던 부분을 고쳐서 바로잡고자 하였다 . .이에 선조의 행적에 관한 여러 이름있는 글과 諸賢이 남긴 문집을 열심히 찾아보고, 비록 한마디 말이나 짤막한 글도 증거와 신빙성이 있으면 애써 한군데로 모았다.13)
즉 문계항은 문치창이 지은 家狀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면서 그 동안 그가 문익점의 행적에 관해 가졌던 여러 의문이 풀리게 되고, 이를 계기로 급기야 그간에 잘못 알려져 있던 문익점의 행적을 바로 잡아 고치는 일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계항의 주도로 이루어진 『삼우당실기』의 초간은 이렇듯 「家狀의 발견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家狀」에 나타난 문익점의 행적에관한 기술이 현전 『삼우당실기』의 삼우당 행적에 관한 내용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삼우당실기』는 家狀 발견 이전에 있어서 알려져 있었던문익점의 행적에 관해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바로 잡은 결과물이기도 하므로 이에대해서는 다음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2) 「家狀」의 발견과 『三憂堂責記』의 編刊
앞서 보았듯이, 『삼우당실기』는 초간 당초부터 「家狀」에 나타나는 문익점의 행적이 중심이 되어 편간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삼우당실기』는 문익점 후손가에서 그 이전에 편한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여러 기록과는 차이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삼우당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에 관한 여러 글들을 모아 정리하려는 노력은 주로 조선 후기에 나타나며, 이는 주로 문익점을 향사하는 서원과 사우에 대하여 賜額을청원하는 움직임과 연관되어 이루어졌다.
문치창이 가장을 지은 이래 오랫동안문익점의 행적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기록정리 작업도 없었다가,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 「行蹟記」라는 것이 처음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 「행적기」가 만들어지는 숙종 34년은 단성 유림이 朴恒泰를 疏首로 해서 道川書院의 사액을 청원하던 해였다 14) 그러므로 이 때의 「행적기」는 도천서원의 청액을 위한 근거 자료의 확보를 위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15)

  그 뒤 영조 42년(1766)에 단성 도천서원의 원임으로 있던 朴思微의 주도로 『忠宣公行蹟記』가 편찬되었는데, 당시 박사징이 쓴 「忠宣公行蹟記序」에는 『충선공행적기』의 편찬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에 행적기가 있었던가 없었던가는 이제 들어 알지 못하나 지난 무자년(1708)에 고을의 父老들이 여러 명현이 기록해 놓은 몇 가지 글을 대강 써서책자로 만들었으나 갑신년(1764) 가을에 業廳이 화재를 입어 재가되었다. 국조 역대왕의 포증은 국승에 실려있는 것으로서 기록하고 혹 고려사에』 베끼고 혹은 선현들의 기록한 것을 모은다든가 또는 문씨족보와 승람에 실려있는 것 중에서 채택해서 모아 『忠宣公行蹟記』라 이름하였다‥‥16)
즉 이 때의 『충선공행적기』는 「家狀」의 존재 같은 것은 전혀 알지 못하고, 당시관찬 사서에 나타나는 (國朝列聖衰贈)과 (高麗史) (先師所記) (文氏譜書) (勝覽所栽)를 참고로 하여 문익점의 행적을 정리 기술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충선공행적기』 이후 『삼우당실기』에 앞서서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기록물로서 현전하는 것 중의 하나가 정조 12년(1788)에 文泳光이 편한 『功行錄』이다. 17) 이 공행록』은 당시까지 알려진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전승 내용이나 관련 자료를 다 양하게 수습하여 편집한 일종의 자료집이다. 『삼우당실기』가 나오기 이전에 있어서 당시까지 알려진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기록의 내용을 살피기 위해서는 『공행록』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행록』에서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문익점이 즐거한 시기를 우왕 9년(홍무 16년 계해, 1383)에 비정한 자료를 많이 수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로서 추정하건대 현전 『삼우당실기』에서 문익점의 졸년을 정종 2년(1400년)으로 하게 된 것은 바로 「家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壽간의 발견은 무엇보다도 문익점의 사망 시기를 고려말이 아닌 조선왕조 개국 이후였다고 하는 사실을 드러냈다는 점이 무엇보다 주목된다.

   『공행록』에서 문익점의 졸년을 우왕 9년에 비정한 것으로는 "강성군 충선공 부민후 삼우당선생"이라는18) 제하의 졸년 기사가 그러하고, 또 영조 48년(1772)에 李漏가 찬한 (神進碑銘 倂序)와 정조 9년(1785)에 黃景源이 찬한 "묘비명 병서"의 졸년 기사가 그러하다 이들 모두 문익점이 홍무 16년 계해(1383, 우왕 9년)에 병으로 졸하며, 이 때 조정에서 특별히 예장을 명하고 효자비를 세워 정려하였다는 것이다.

  『공행록』 가운데 문익점의 졸년이 언급되어 있는 모든 기록이 이처럼 흥무 16년으로 나타난다면 당시에는 문익점이 조선 개국 이전에 졸했던 것으로 알려졌던 셈이다. 문익점의 졸년이 조선 왕조의 개국에 수년이나 앞선 우왕 9년(1383)이 아니라, 조선 왕조 개국 후 수년이 경과한 정종 2년(1400)이라는 「家狀」의 기록은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의 기본 줄거리를 새롭게 살펴보게 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李漏가 찬한 문익점의 (神道碑銘)이나 황경원이 찬한 문익점의 묘비명 가운데 문익점의 졸년과 관련된 내용은 그 후 고쳐 바로잡지 않으면 안되었고,그러한 이정 작업의 흔적은 현전 『삼우당실기』에 실제로 남아 있기도 하다. 19)

이 밖에 (江城君忠宣公富民候三憂堂文先生)에는 그가 使行으로 入元한 시기를 甲辰(1364)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당시 원으로 가는 사행에는 德興君이 上使, 문익점이 副使, 崔擺가 從事官이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기도 하여,20) 『삼우당실기,와 비교해서 사실 관계의 기술에 현격한 오류가 있음도 엿볼 수 있다. 
1870년 『三憂堂實記』의 編次를 보면 (世系) (年報) (文) (衰典) (經述) (追錄)의 여섯 편에 序文과 跳文이 붙어있다 21) 이를 1766딘 박사휘가 편한-충선공행적기』와 1788년 문영강이 집록한 『공행록』과 비교해 보면, 『삼우당실기』에 이르러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변모는 삼우당의 생애에 대한 '年報'가 비로소 나타나고, 연보의 내용이 충실을 기할 수 있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삼운당의 생애에 대한 연보가 충실을 기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雰냐의 발견으로발미 암은 것 이 었다

 

ll. 「家狀」 所載 文益漸의 行蹟

1) 出生과 仕覆
...아들 中庸은 아비의 喪을 당하여 3년을 侍墓하였고, 이어서 어미의 상을 당하여 또 3년을 시묘하였으며, 상을 마친 뒤에는 그대로 晉陽에 숨어 있다. 25)라고 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즉 태종 원년 당시는 이미 문익점이 사거한지 적어도 수년이 경과되었음이 확인되고, 따라서 그의 졸년은 「家狀」에 나타난 것처럼定宗 2년(1400)일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문익점의 생애와 관련해서 우선 분명히 확정할 수 있는 사실의 하나는 그가 태조 7년에 사망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실록』에 따르면 그의 사망시 나이는 70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문익점의 출생년은 1328년(충숙왕 15년)이 된다. 그런데 그의 과거 급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고려조의 科擧事蹟에 따르면 문익점은 공민왕 9년(1360) 당시 년30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에서 역산하면 「家狀」에 나타난 대로 고려 충혜왕원년(1331년) 신미 출생 기록에 합치한다. 26)
따라서 현재로서는 문익점이 즐년 당시 년 70이었다는 『태조실록』의 기록이 잘못되었거나, 공민왕 9년 그가 과거에 급제할 당시 나이 30이라는 前朝 科擧事蹟의 기록이 잘못되었거나, 둘 중 어느 한 기록이 잘못 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27)

  「家狀」의 출생년도가 「前朝科擧事蹟」의 기록에 부합하는 것은 문치창이 「가장을 찬할 당시 그가 종가에 소장된 문서 가운데 방목이나 교지(홍패)같은 것을 참고하여 선조의 출생 연대를 추정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家狀」에 나타난 그의 졸년이 문치창이 추정해서 기록한 것이라면, 그의 추정 근거는, 「家狀」에 나타나고 있듯이, " 定宗 2년에 禮葬을 명하고 祭田을 하사하고 墓祠을 세우도록 하였다"라 는28) 사실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9)

「家狀」의 기록이 官濯 기록에 나타나는 것과 비교해서 아주 자세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부분은 문익점의 官歷에 관련된 내용이다. 30) 문익점의 생애는 주로 그의 재원시 행적이나 귀국 시기 및 목면 시배 시점 등을 두고 관련 기록간에 상위한 내용이 문제가 되었으나, 이와 관련해서 그의 관력에 대해서도 『實錄』과 같은 官撰기록과 「家狀」의 내용 간에는 상위한 내용이 없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그의 관력의 대체를 살피기 위해 『태조실록』의 문익점 졸기 기사에서 해당 내용 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左司議大夫 문익점이 卒하였다. 익점은 진주 강성현 사람으로 아버지 文淑宣은 과거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익점은 가업을 계승하여 글을 읽어 공민왕 경자년에 과거에 올라 金海府 司錄에 임명되었으며, 계묘년에 諄兪博士로써 左正言에 승진되어 計○使 左侍中 李公遂의 書狀官으로 원에 같다‥‥ 洪武 乙卵年에‥‥ 典儀注簿로 삼았는데,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左司護大夫에 이르렀다가 졸하니, 나이 70이었다 본조에 이르러‥‥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 江城君을 贈하였다. 31)
이상 (졸기)에서 드러나는 그의 관력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문익점은 공민왕 경자년에 급제한 후 처음 金海府 司錄에 임명되고, 계묘년 左正言에 승진되어 원에가기 직전에는 순유박사였고, 원에서 귀국한 뒤에는 고향으로 내려가며, 그 뒤 목면 보급에 따른 공적이 조정에 알려져 洪武 을묘년에 典儀注簿에 제배되며,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家狀」에 따르면, 문익점은 사행 이전 시기인 신축년에 藝文館 直講, 임인년에 承奉郎, 계묘년에 사간원좌정언에 이르고 이 때 언관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원에서 귀국하는 해인 1367년에는 中顯大夫 藝文館提學 兼 知製敎에 直拜되나, 휴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이해 겨울에成均館 學官에 선발되며, 다음해인 1368년 겨울에는 禮文館提學 兼成均館司成이된다. 기유년 가을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행하고 喪制를 다한 뒤에도 병으로 거동을 못하다가 그가 다시 벼슬에 오르는 것은 계축년(1373)으로 나타나고 이 때 中顯大夫左代言 右文館提學 兼 知製敎에 제수되나, 이해 겨울 정몽주 등과 함께 北元 使臣의 접견을 항의하는 소를 올린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淸適郡守로 좌천되었다. 그 후 왜구의 침략과 모친상을 겪은 뒤, 무진년(1388) 가을에 左司議大夫右文館提學 兼서연동지사를 제수받았으나, 다음 해 昌王 2년(1389) 8월에 趙浚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고, 恭讓王 2년(1390) 8월에 다시 左司議大夫 右文館提學 書筵同知事 兼成均館大司成에 제수되는 것을 끝으로 이해 11월에 신병으로 사임을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2003년 5월 30일 경상대에서 발표

표2 太祖實錄』 卒記와 「家狀」에 나타나는 문익점의 官歷

 년도

    家狀

  實錄

        綜合

  1360

  及第

及第 金海府司錄

  及第. 金海府司祿

  1361

  藝文館 直講

 

  禮文館 直講

  1362

  承奉郎

 

  承奉郎

  1363

  좌정언

순유박사 좌정언

  순유박사 좌정언

1363 ~ 1367

在 元

1367

中顯大夫藝文館提學兼知製敎

 

  中顯大夫藝文館提學兼知製敎

1368 

中顯大夫藝文館堤學成均館司成

 

中顯犬夫藝文館提學兼成埼館司成

1368 ~ 1373

在 江城

1373 

中顯大夫左代言右文館提學兼知製敎

 

中顯大夫左代言文館提學知製敎

(冬) 淸道郡守

 

(冬) 淸道郡守

1375

 

  典儀主簿

典儀主簿

1375 ~ 1388

강성현에 머무름

 1388 

左司議大夫右文館提學書達同知事

 (官至)左司講大夫

가장과 같음

 1390

左司議犬夫右文館提學兼成均館大成

 

가장과 같음

 

『실록』 졸기와 『실기』의 가장에 나타나는 문익점의 관력을 비교 열거하고, 이를 종합하여 표로 나타내면 위의 (표 1)과 같다. 이상 『실록』과 「家狀」에 나타난그의 관력을 고찰하건대 양 기록간에 모순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문치창의「家狀」이 문익점의 관력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실록에 나타난 그의 관력과 모순없이 종합될 수 있다는 것은, 가장이 家乘 혹은 家藏 文書를 토대로 작성했던 것이었기에 가능한 것이고, 이 점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사실 관계의 확인에 있어서 가장이 신뢰할만한 자료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2) 元 使行과 德興君 事件

문익점의 행적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그가 사행으로 元都에 간 시기와 그 의 在元時 행적과 관련된 부분이다. 『태조실록』의 문익점 졸기에 의하면, 그가使行으로 元에 간 시기는 공민왕 12년(1363)으로, 당시 그는 左正言에 승진되어 計稟使 李公遂의 書狀官이 되어 원에 갔던 것으로 되어 있다. 『실록』에는 이처럼 그가 원에 간 시기가 공민왕 12년이고, 또 그가 계품사 이공수의 서장관 자격으로 갔다는 사실을 명기하고 있지만, 후대에 기술된 그의 행적에 관한 여러 기록에는 흔히 그가 원에 간 시기를 갑진년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나타나며32) 그가 서장관의 자격으로 간 사실도 분명히 명기한 경우도 그다지 찾아지지 않는다. 33)

  한편 『高麗史』의 문익점 열전에 따르면, 이 때의 사행에서 문익점은 德興君 측에붙어서 원에 머무르다가 덕흥군이 패함으로 인하여 귀국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34) 이 때문에 그가 원도에 머문 기간과 귀국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해서 그가 원으로 갈 무렵에 진행되고 있었던 공민왕의 폐위와 덕홍군 옹립 사건의 시간적 추이와 국내측 동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

  원에서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고려 국왕에 책봉한 것은 元 順帝 22년(1362) 12월이었다. 35) 이 사실은 곧 바로 고려에 소문으로 알려졌던 것으로 보이며, 공민왕은 이 소문을 접하자 朝臣들 가운데 모반을 꾀하는 자가 있을 것에 대비하여 吏部尙書 洪師範을 西北面體○使로 삼아 진위 여부를 조사케 하는 등 즉각적인 조처를 강구하게 된다 36) 한편 당시 홍건적의 침입으로 피난해 있던 福州(安東) 행재소를 떠나 개경으로의 환도를 서둘러, 이듬해 공민왕 12년 1월에는 청주에 이르고, 2월에는 다시 청주를 출발하여 이 달에 개경 興王寺에 이르러 백관으로부터 환도의 하례를 받고 이 곳을 임시 어궁으로 정한다. 37)  贊成使 李公遂 일행이 원으로 파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개경 환도 직후인 공민왕12년 3월이었다 38) 이 때 이공수 일행의 사행은, 그 동안 홍건적의 난으로 불가피복주(안동)에 까지 피난하게 된 사정을 설명하고, 그로 인하여 그 사이 원 조정과의 정상적인 사절 왕래가 불가능하였던 사정을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 사행으로서, 이 때의 表文에는 공민왕 폐위의 부당성 등을 호소하는 내용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다. 물론 당시는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고려 국왕에 책봉한 사실을 이미소문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표면상의 사행 목적 이외에 원도에서의 동정을살피려는 의도가 수반되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하튼 공민왕의 폐위와 덕흥군의 고려 국왕 책봉에 항변하는 내용을 전달하기위린 사철단은 3월의 이공수 일행이 아니라 이 해 4월에 파견된 密直商議 洪淳 同知營直司事 李壽林 등으로 구성된 사절단이었다. 39)

이 때의 사절단은 바로 前月윤3월에 있었던 金庸의 반란을 진압한 직후에 파견된 사절단이기도 하였다.  소위 '與王寺의 變'으로 일컬어지는 김용의 반란은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고려 국왕에 책봉한 원제의 명에 내응한 고려측 附元 세력의 준동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의 시해로까지 이어질 번했던 이 때의 책동은 崔瑩 등 무장 세력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따라서 흥왕사의 변을 진압한 직후 공민왕이 원에 파견한 흥순 등의 사절단은 성격상 앞서 이공수 등의 사절단과는 달랐다.
즉 이 때의 사절단은 원에서 공민왕 폐위하고 덕흥군을 옹립하려는 책동의 부당성을 직접 적이고 적극적으로 항변하는 사절단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때 의 사절단이 원의 御史臺, 中書省, ○事院 등에 百官 ○老의 뜻이라고 하여 보내진 항변서의 내용을 보면, 공민왕의 폐위 결정은 元都에 있는 고려의 不送한 무리들이 조장한 허망한 말을 元朝가 그대로 따른 것이니 이들 흉도들을 강력히 처벌하여 報功去○의 의지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문익점이 원도에 간 것이 『실록』에 나타난대로 이공수의 서장관으로서 였다면 당시 그의 사행 목적은 개경 환도 이후 그간 홍건적의 침입으로 원과의 외교적 교섭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사정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高麗史』에 의하면 공민왕 12년 3월에 원에 간 이공수의 서장관은 문익점이 아닌 林璞이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40) 문익점이 이공수의 서장관으로 원에 갔다는 『태조실록』의 기록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家狀」에는 그가 서장관으로 원에 갔다는 사실은 나타나고 있으나, 어떤 어떤 사 행단의 일원으로 갔는지를 명기하고 있지 않다. 「家狀」의 내웅 중에는 그가 이공수 를 만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이공수는 문익점 보다 앞서 원도 에 왔다고 기술하고 있고, 당시 그는 원으로부터 태상경의 관직을 받고 있었다고 한 다. 41)

또한 가장에는 그가 서장관으로 원에 가게된 사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인다.

이에 앞서 국가에 틈이 많았으니, 서로는 紅賊, 남으로는 왜구가 걱정거리였다 또한 元朝로 부터 見責을 받아 앞서 원에 들어간 모든 사신이 한 사람도 돌아온 사람이 없었다. 또 봄이 다 가도록 正朔의 ○赦를 행하지 않았고 출국한 사신은 돌아오지를 않으니, 안밖으로 소식이 끊기어 의심하고 두려워 마음을 정할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사신을 다시 보내어 사정을 아뢰어 원제의 마음을 깨치케하는 일을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겨 윈으로 가는 것을 꺼했은나 선생은 서장관으로 원나라로 갔다 42)

  

이 「家狀」의 내용에 의하면 그의 사행단은, 원에 들어간 많은 사신이 돌아오지 못하고, 또 봄이 다 가도록 매년 천자의 正朔 때 관례적으로 행하는 ○赦의 조칙이 이르지 않아, 안밖으로 소식이 끊기어 의심과 두려움이 걷잡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고려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어 본국 사정을 알려 원제의 마음을 돌리려는 목적의 사행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에 따른 사행은 앞서 이공수 일단이 아니라 시기적으로 흥순,이수림 사행단의 사행 목적에 부합되는 것이다. 흥순, 이수림 일행이 원의 御史臺나 中書省 등에 올린 진정서의 내용을 보면, "小邦이 賊을 평정하고 길을 통한 뒤에 獻○ 賀正 謝恩 賀聖節 등의 使者가 서로 이어졌으나 아직 한 사람도 본국으로 돌아온 자가 없고, 또 봄이 다가는데도 正朔의 ○賜가 없고 출국한 사신이 이르지 않으니..."라고 하는 내웅 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43) 
따라서 문익점이 이공수의 서장관으로서가 아니라, 덕흥군의 국내측 내응 세력을 일망 타진한 뒤에 출발한 사행단의 일원으로 갔다면, 『고려사』 열전에 나타난 것처럼 "사신을 받들어 원에 감으로 인해 머물러 덕흥군에 붙었다(奉使如元 因留附德興君)"라고 하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44)

  

3) 在元 行跡과 木綿種의 齋來
가장은 문익점의 재원시 행적에 대해서 상세한 내웅을 담고 있는 유일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가운데 그의 재원시 행적과 관련하여 『고려사』나 『실록』의 기사와 상충되는 부분이 바로 그가 귀국한 시기에 관한 문제이다. 그의 귀국 시기는 바로 문익점의 재원시 행적과 체류 기간 등에 연관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선 「家狀」에 나타나는 그의 재원시 행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문익점은 처음 원으로부터 禮部侍郎이란 관직을 제수받았다고 한다. 45) 당시는 元帝가 이미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명한 시기였으므로 元都에 이른 사신들은 대부분 덕흥군으로부터 僞書와 僞官 등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짐작컨대, 위서나 위관은 덕흥군 측에 협력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 덕흥군 즉위 후의관직 보장에 대한 약속을 뜻하는 것이다.

家狀에 따르면 문익점은 원도에 이른 처음 元帝는 그를 예부시랑에 제수하였는데, 이는 덕흥군으로부터 받은 僞官이 아닌 원조의 관직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그러던 중 자신의 이름을 趙可達이라고 하는 자가 찾아와 그를 은근히 유혹했으나이를 거절한 적이 있었는데, 뒤에 알고보니 그가 이 때 만났던 조가달이라는 자가바로 덕흥군이었다고 한다. 46)

  그가 덕흥군의 제의를 거절하자 다음에는 원제가 황제의 위세로서 덕흥군을 따를것을 종용하였는데 이 또한 문익점은 거절하였다고 한다. 당시 원제가 강압적으로 덕흥군에 가담토록 종용한 것에 대해 문익점은,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는두 군주가 없다"는 말을 즉각적으로 답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후대에 문익점의 충절을 드러낼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 되기도 하였다. 여하튼 이 때 문익점은 황제의 명을 거역했다는 죄로 42일 동안 외부와 단절되어 구류를 당하였는데, 오히려 이 때 역신 崔濡는 그가 덕흥군 측에 붙었다는 첫소문을 유포하기도 하였다  그 뒤 원제가, 덕흥군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를 회유하기 위해 구류에서 풀어 다 시 일을 보게 하였다 그러자 그는 僞書와 認帖 및 誘書 수십여 장을 불에 태우는 등 元帝의 명을 거역하는 행동을 계속함으로서 이해 11월에 교지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가 유배지에 도착하기는 이듬해(1364) 2월이었고, 병오년(1366) 9월 귀양살이에서 풀릴 때까지 그는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가 귀양살이 하는 곳에는 신비한 샘물이 솟아 원근에서 사람들이 샘물을 길어 가기도 하였다는 일화가 있는가 하면, 이 밖에 귀양살이 중에 達成貴라는 고상한 사람과 상종하여 雲南 지방의 풍물을 많이 알게 되어 손수 『雲南風土集』이라는 책 을 짓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가 목면씨를 얻게 되는 것은 이 때 귀양살이에서 풀려 원도로 귀환하는 도중 밭 가운데 핀 목면화를 보게 되면서였다고 한다. 다음 해(1367) 정월에 그가 元都 에 이르자 원제는 그를 다시 예부시랑 어사대부에 임명하였으나 사임을 청하고 귀국길에 올라 2월에 송경에 도착하였다. 그가 귀국하자 공민왕은 中顯大夫禮文館提學兼知製敎의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곧바로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家狀」에 따르면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 장인 鄭天益과 함께 목면 종자를 심게 되는 것은 정미년(1397) 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태조실록에는 문익점이 원에서 귀국한 해를 갑진년이라고 명기하고 있고,
고려사열전에는 "덕흥군이 폐하자 귀국하였다"라고 하여 역시 갑진년에 귀국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鮮初의 官撰 史書에 나타난 그의 귀국 연대는 가장에 나타나는 그의 귀국 시기와 3년간의 차이가 있는 셈이다 47)

  그런데 그의 元에서의 3년간 유배 사실에 대해서는 조선조 전시기를 통해서도 일찍이 이를 의문시 한 경우가 찾아지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그가 갑진에 귀국하였다는 태조실록의 기록을 보다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추세에 있다 48) 만약 이를 따르게 되면 그가 원에 가서 3년간 유배 생활을 겪은 나머지 목면 종자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다소 극적인 그의 행적은 자동적으로 부인되게 되며, 또 이와 관련해서 고려사에 기술된 "奉使如元 因留附德與君"이라는 불명예스런 행적이 기정사실화 될 개연성이 커지는 것이다. 이 경우 목면 종자의 취득 과정도 달리 설명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의 갑진년 귀국을 타당시하는 견해에 의하면, 당시 중국에서는 목면 재배가 북경에 까지 파급되었고, 따라서 당시 목면 종자를 구하는 일은 강남 지역에서만이 아니라 북경 근교에서도 쉽게 이를 구할 수 있었다고한다 49)

  그근나 문익점이 원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겪었다는 사실은 비단 가장에만 기술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사후 불과 4년이 지난 태종 1년에 권근이 문익점의 장자 文中庸을 서용할 것을 상서하는 내용 가운데, "故간의대부 文益漸이 처음 강남으로 들어가 목면 종자 수매를 가져왔다"라는 기록이 있는 바,50)
그의 원에서의 체류 기간을 논외로 하면 일단 그가 元都를 떠나 강남으로 갔다는 사실은 인정된다고 하겠다

  이 밖에 현전 『삼우당실기』에는 문익점 사후 얼마 되지 않은 세종 경신년(1440)의 賜墓祭文과 세조 정축년(1457)의 賜墓祭文이 보이는 바, 여기에도 그의 南荒유배 사실이 언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1) 특히 다음에서 보듯 세종 경신년(1440)의 賜墓祭文에 언급되고 있는 문익점의 재원시 행적은 문치창의 「가장에 나타난 재원 행적과 정확히 내용이 일치하는 것이다 「家狀」에 기술된 '謫南荒 사실을 신뢰케 한다.
공민왕을 섬긴 신하로 곧은 절개 버리지 않았었네 중국 諫院에서 僞書를 불에태우고 말은 天潢을 움직이게 하였네. 귀양살이 3년을 하였지만 그 의로운 기운은 펄펄도 하였지 몰래 좋은 씨앗 구해서는 고려 서울 개성으로 돌아왔고 무명베의 利를 끼쳐 우리 백성 옷 입혀 주었네.52)

위 제문은 그의 사후 불과 4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문익점의 공적을 집약적으로기린 내용으로, 諫院에서 僞書을 불에 태우고 3년의 귀양살이를 했다는 내용은 문치창의 가장에 나타난 문익점의 재원 행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는 가장에 기술된 '謫南荒' 사실을 신뢰할만한 기록임을 확신케 한다.

  

맺 음 말
본고는 문익점의 증손 文致昌이 세조 10년(1464)에 撰한 『三憂堂實記』 所載의「家狀」이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임을 밝히고, 이를 줌심으로 문익점의 생졸 년월, 그의 재원시 행적 및 그가 목면 종자를 전래한시기 등, 그의 생애와 행적에서 주로 의문시되는 내웅에 대해 관련 자료를 비교 검토한 글이다. 본고에서 다룬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文益漸이 남긴 遣文을 포함해서 그의 생애와 행적에 관한 자료를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는 삼우당실기는 그 초간 연대에서 나타나듯이 가장의의 발견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실제 현전 『삼우당실기』 연보의 내용은 실기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만큼 가장은 문익점의 행적을 알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자료라고 할 수 있다.

  「家狀」의 발견은 그 이전까지 잘못 알려졌거나 분명하지 않은 문익점의 행적을 많은 부분 바로 잡기도 하였다. 『삼우당실기』에 앞서 문익점의 행적을 輯錄한 『功行錄』을 살펴보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문익점이 원에 사행한 시기나 목적, 그의 졸년 등이 잘못 기술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그가 甲辰年에 正使 德興君의 副使로서 원에 갔던 것으로 기술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가장의 발견 이전만 하더라도 문익점의 행적은 사실 관계의 기술에 현격한 오류가 있었음이 발견된다.  「가장」은 문익점의 행적을 알려주는데 있어서 중요하면서도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는데, 「가장」에 기술된 문익점의 생졸 년월 그의 재원시 행적 및 그가 목면 종자를 전래한 시기에 대해 본고에서 검토한 바는 다음과 같다. 
문익점의 출생 년도는 가장이 발견되기 이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그의 卒年은 조선조를 통하여 오랫동안 잘못 알려져 있었다. 문익점이 정종 2년에 졸했다는 가장의 기록도 잘못된 것으로, 태조실록 졸기에 나타난 대로 그가 태조 7년(1398)에 졸했음은 분명한 사실로 확인된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를 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문익점의 졸년은 한동안 우왕 9년(1383)으로 잘못 알려져 묘갈명 등에 그렇게 새겨지기도 하였고, 가장 발견 이후에는 정종 2년(1400)으로 오랫동안잘못 알려졌던 것이다.

가장의 기록이 官撰 기록에 나타나는 것과 비교해서 아주 자세한 부분은 문익점의 官歷에 관련된 내용이다. 「家狀」은 문익점의 관력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실록 등의 관찬 기록에 나타나는 내용과 상충됨이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가장이 관찬 기록물과는 달리 家乘 혹은 家藏 文書를 토대로 작성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이 점에서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사실관계의 기술에 있어서 가장이 중요하고도 신뢰할만한 자료임이 확인된다. 

 

문익점의 행적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그의 在元時 행적과 관련된 부분이다.가장을 통해서 볼 때, 문익점은 계묘년 3월의 이공수 일행으로서가 아니라 이 해 4월에 파견된 洪淳 일행으로 원에 갔던 것으로 보인다.
계묘년 4월의 홍순일행은, 덕흥군의 국내측 내응 세력을 일망 타진한 뒤에 출발한 사행으로서, 그가 덕흥군 측에 가담하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희박했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은 문익점의 재원 3년의 행적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사열전이나 태조실록에는 그가 사행으로 원에 들어간 이듬 해에 귀국한 것으로 되어있어 그의 재원 3년의 행적은 그 사실 여부가 의문시 되고 있다.
태조실록과 같은 관찬 기록물에 나타난 기록을 근거없이 부인할 수는 없겠으나,그가 원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겪었다는 사실은 비단 가장에서만 기술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조선조를 통하여 줄곧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졌음도 간과할 수 없다.
이 점에서 그의 원에서의 3년간 유배 생활에 대해서는 일단 이를 사실로서 접근할 필요가 있고, 동시에 그 진위 여부가 확인, 검토되어야 한다고 본다


 

주석문 내용

 

 

 1

1.현재 文益漸을 향사하는 서원과 사우로는 道川書院(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을 비롯해서 長淵書院(전남 나주군 남평면 풍림리), 楮山書院(전북 김제군 공덕명 회룡리), 江城書院(전남  장흥군 유치면 늑용리), 鳳岡書院(경북 군위군 우보면 봉산동), 不조廟(전남 보성군 미륵면 도개리), 忠宣公 別廟(경북 울진면 화성리), 光東影堂(전남 광주시 서석동) 등을 들 수  있다

2

2. 문치창이 쓴 文益漸의 行蹟에 관한 기록을 庚午刊(1870) 삼우당실기에는 이를 '事寶本紀'로  題하였고, 庚于刊(1900) 『三憂堂실기』에는 이를 '家傳'으로 題하였다. 최근 간행된 『南平文氏  大同譜』에 이를 '家狀'이라고 표현한 곳이 보이는 데, 본고에서는 '家狀'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보아 이를 따랐다. 문치창이 쓴 「家狀」은 지금도 南平文氏 문중의 누군가가 보관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으니- 아직 이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세조 10년(1464)에 지은 문익점의 행   적에 찬한 기록이 지금껏 보존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겠으나, 이를 후손 文桂恒이 1808년에 발   견하였다고 하므로, 이후 「寮熱」의 보존 문제는 이 시점부터가 문제일 것이다. 그 사이 별다른  분실 사유가 없다면 누군가에 의해 보관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3

3)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을 다룬 중요 논저는 다음과 같다.

   ⊙承承濟, 「李朝 綿業의 辰開過정」, ⊙『李병도박사華甲記念論叢』, --朝閣, 1956. 
  ⊙朴性植, 「麗末鮮初의 木綿業에 대하여」, 『大邱史學』 17, 1979.   ⊙李載浩, 「乙支文德과 木綿의 異論에 관한 일고찰」 『韓國史硏究』 39, 1982.   ⊙崔永好, 「高麗末 慶尙道地의 木綿 보급과 그 주도세력」, 『考古歷史學志』 5,6합집, 1990.   ⊙金畿俊. 「文益漸과 木綿씨 傳播의 歷史的 背景」,『문익점과 무명문화』, 1991.   ⊙吳主煥, 『山淸鄕上史』, 山淸문화원, 1995.

4

4) 文致창이 丹城에 온 것과 관련해서는 『삼우당실기』(庚子刊, 1900), 世系源流에 "救端宗 禍謫龜城"이라 하였고, 『南平文氏大同譜』(1995년)에는, "世祖元年 丙子에 柳秀藩 李曾碩 具致明과  터불어 魯山君을 구하려다 화가 鞠刑에 廷至하였으나 충신의 후예로써 龜城으로 俱蒙宥謫하여 江城君 事寶本龍를 지으시다"라고 하여, 龜械(丹城의 별칭)은 그의 유배지였으며, 家狀(=  江城君 事寶本紀)은 이 때의 유배 생활 증에 지은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시기적으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5

三憂堂實記』 卷2, 附錄, 家傳, "去辛巳冬 與三從兄某 自京師 展省先墓于珍城 入宗家 遍閱先世  遺蹟 丙午외燼之餘 存者亦頗放失 余於是又懼其愈久而愈失 不顧잠踰 左右搜輯 참互見聞 記若   千言 以侯後之繼述者得焉"

6

6) 경오刊 『三憂堂實記』의 諸賢詩詞(『道川院蹟』, 誇賢詞章과 同)와 庚于刊 『삼우당실기』, 諸賢詩章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7

凉國與地勝覽』에 龜城, 珍城은 丹城의 別名으로 나타난다

8

『삼우당實記』 卷2, 附錄, 諸賢詩章.

9

삼우당실기 卷2, 消錄, 諸賢詩章. 문익점의 공적에 대한 이러한 칭송은 거의 동시기에 지은  南孝溫의 「木綿花記」에도 보인다(『三憂堂실記』 卷2, 附錄, 木綿花記)

10

太宗賓錄』 卷1, 원년 윤3월 庚寅, "擢文中庸爲司憲監察 崔海山軍器注簿 참贊權近上書曰 故諫議大夫文益漸 初入江南  ○木○種子數매○來 送於晋陽村舍 始織木○進上 是故木○之興  始於晉陽 由此廣布-國 凡民上下 皆得以衣之 是皆益漸之所賜也 大有功德於民 而不食其報早○ 其予中庸 遭父喪 廬墓三年 ○遭母喪 又廬於墓三年 終制○隱於晋陽 勤謹孝廉 可用之士也 故知門下府事崔茂宣始劑火藥能制海○實有功於國家其予海山亦宜敍用 從之"

11

『태종실록』 권5, 3년 2월 己未 및 『태종실록 권5, 3년 3월 庚辰. 『삼우당실기』와 『남평문씨  족보』에는 그가 正言을 거친 사실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12

『삼우당실기(1900) 권6 年譜, "世祖8年 家傳成 曾孫監察致昌撰 中間見○ 純祖戊辰 文氏修譜  時 得於後孫之在海島者

13

三憂堂실기』(1900) 舊跋(文桂恒), "三憂堂先生 於桂恒爲十七代祖也 旣歿之四百餘年 世代綿遠  宗嗣屢乏 先生所著詩文及疏章 不爲不多 初火于家 再燼于兵 蕩然無傳 而中間收錄 只有家傳-- 本盖天順甲申 監察公致昌所撰 而亦且遣逸 伊後所傳 特各家所記若于私乘而已‥‥去戊辰夏 幸因譜書之刊役 得所謂家傳一卷 卽天順八年之遣輯者也 桂恒卽관手開卷 瞭焉如○心目 自是不覺愚 

○  濫生○意 留心於革謬歸正之域 冬長興宗老就光氏 枉駕立雪 而於亦先獲志者也 於是竭探諸名  勝述作 ○諸賢遣集 雖片言雙字 有足以徵信者 則幷力鳩集...

 14

삼우당實記』 권5, 附錄, 道川書院請額練

15

문익점을 향사하는 일반 祠字와는 달리 書院으로 賜額을 받기 위해서는 그의 학문적 공적을  증빙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 무렵에 쓰여진 문익점에 행적에 판한 기록은 그의 목면 전  래의 공적 보다는 그의 학문적 업적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16

『三憂堂責記』 권1, 舊序, "前古行蹟有無 今未聞知 而越在戊子歲 鄕父老略記名賢所銳二三條 以成  卷○矣 甲申秋 幽奠廳火變 盡人灰燼 不○適以冒添院任 漑然于先生行蹟○而傳 旁求可○  則前朝事 其誰詳錄也 與同任都命嵩朴思權 순求左右 國朝列聖褒贈 以國乘所載錄之 業謄麗史所裁 或輯先師所記  及文氏譜書勝覽所載中 採而集之 忘某孤陋 以成卷帙 辛或免識者之초諦耶 謹以  序次如右 名日忠宣公行蹟記" 

17

필자가 본고를 준비하면서 검토한 『功行錄』은 현채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소장 자료 가은  데 『江城君事實錄』(筆寫本)이라고 되어 있는 책자이다. 이 책의 말미에 文泳光의 발문인 '충선공功行錄跋이 있어 이 것이 공행록을 필사해 둔 것으로 보아 본고에서는 이를 『공행록』으로 추정 하였다.

18

이는 누가 썼는지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문영광의 글로 보인다. 

19

이○가 찬한 신도비명 병서는 홍무 16년 계해 공이 병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53이었다.신우가 명하여 단성 갈로산 向酉의 자리에 예장을 명하였다. 본조에 이르러 윌 정종대왕께서 강성군에 추봉하고..."를

<실기>에서는 "...얼마 뒤 고려가 망하니 공은 두문불출하였다. 庚辰에  공이 졸하니 향년 70이었다. 본조에 이르러 우리 정종대왕께서 공을 ‥‥禮葬하도록 명하고로  고치고, 그렇게 고친 근거를 <신도비명 병서>의 말미에 부기하기를 " 本草에 이르기를 公卒未幾 高麗革命"이라고 하였는데 만약 이미 돌아가신 뒤라면 어찌 두문동에 참여하실 것이며  또 어째서 테조가 누차 테종에게 안부를 물었겠는가..) 라고 하였다.    또 黃景源이 撰한 墓誌銘 井序는, "홍무 16년 계해 2월 초8일에 병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53이었다. 辛禑가 갈로개산에 예장하라고 명하고 비석을 세워 정려하였다. "로 되어 있는 것을

실기(1870)에서는 "흥무 16년 계해에는 비석을 세워 정려하다. 건문 2년 경진 2월 초 8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나이 70이었다. 공정대왕이‥‥ 예장을 명하셨다"라고 하고 이령게 고친 근거로 <묘지명 병서> 말미 "본고에서는 계해 2월 8일에 병으로 졸하신 것으로 잘못 말하였으므로 고쳐서 바로 잡기를 청하였으나 간행된 刊集 중에는 미쳐 고치지 못하였다"라고 부기하고  있다.

 20

강성군사실록, 강성군창선공부민후삼우문선생 "至正甲辰 以左司議 奉使入元 士使德興君 副使公也 從事崔濡 譜于元帝 謀廢恭愍..."

 21

필자는 아직 초간본 『삼우당실기』를 보지 못하였다. 庚午刊 『三憂堂實記』(1870)의 편차와 목록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世系 年報 遺文 詩六首 포褒典: 世宗朝賜墓祭文 世祖朝賜墓祭文 正祖朝賜額江城祠祭文   正祖朝賜額道川書院祭文 太宗朝傳敎 世宗朝傳敎 世祖朝傳敎 中宗朝傳敎 宣祖朝傳敎(庚午, 甲午) 景宗朝傳敎 英祖朝傳敎(丁卯 戊寅 丙戌 戊子) 正祖朝傳敎(甲辰 丁未) 敍述: 高麗사列傳  行狀 事實本記 神도碑銘 墓謁銘 孝子碑閣記 墓祠記 孝子碑閣重修記 丹城健院記 行蹟記序 淵源錄 盛德齋記 江城祠圖記 大庇齋記 道川書院重修記 杏壇記 木綿花記 諸賢詩詞 道川書院春秋香祝文 江城祠春執香祝文 月川祠合享告由由文 江城祠賜額告由祝文 道川書院賂額告由祝文 諸書考訂 附(請立祠疏 道川書院請額疏 江城祠請額上言 道川書院請復額上言 請復不조疏 請從享文廟疏)

追錄: 忠肅公事實附(忠肅公事實別祿 고려사열전 東史纂要(抄, 詩三首附) 史臣論(徐四佳  詩一首附) 李眉수論(만詞一章 附) 金借畢齋詩(三首) 고간院記(唐人詩一首附) 跋

이 庚午刊 『三憂堂실기』 가운데 敍述篇의 附篇과 追錄篇을 제외한 나머지 世系, 年譜, 遣文,   褒典, 敍述篇의 내용이 『삼우당실기』 초간본의 내용을 구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2

「家狀」에 문익점의 생년 및 졸년시 월일이 모두 2월 8일로 되어있는 것에서 그의 생졸연월일은 어떤 기준에 따라 추산하여 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3

문익점의 출생 연도는 前朝 科擧事蹟(그는 공민왕 9년 정목주 임박 등과 등과 同榜及第함)에 辛未生이란 사실이 기제되어 있어 「家狀」이 발견되기 이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생월일이 2월 8일로 나타나는 것은 「家狀」에서만 볼 수 있다.

24

조선왕조실록은 1925~1929년(4년간)에 걸쳐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을 4분의1로 축소하여 "이조실록'이라는 이름으로 30부 한정판으로 출판하였으나 대부분 일본으로 가져가 국내에는 7, 8부 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며,그것도 몇곳의 도서관에 秘藏하여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그 후 1995년~1959년(4년간)에 걸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태백산본을 8  분의 1로 축소하여 "조선왕조실록으로 표제하여 영인 출판하였으니, 『태조실록의 문익점 졸기를 접할 수 있기는 이 때에 비롯된다고 본다.

25

태종실록 卷1 원년 윤3월 庚寅, "참찬權近상서왈 고 간의대부 문익점 初入江南○木면種子數枚 ○來

送於晉陽村舍 是織木면進上 是故木면之興 始於晉陽 由 此廣布一國 凡民上下○得以衣之  是○익점之所賜也 大有功德於民 而不食其報○ 其子中庸 遭父喪 廬墓三年 ○遭母喪 又廬於墓三年 終制○隱於晉陽"

 

26

家狀에서 문익점의 생년을 충혜왕 원년에 비정한 첫은 '前朝과거事蹟'을 참고했던 것으로  추정 된다.

27

문익점이 공민왕 9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것은 태조실록 졸기에도 명기되고있다. 따라서 문익점은 고려 충혜왕 원년(1331)에 태어나 태조 7년(1398)에 졸하였고 당시 향년 68세  였다고 한다면 모순이 없겠으나,함부로 단정할 것은 못된다

28

삼우당실기 권2, 부록, 家傳, "庚辰二月八日 終于第命葬於珍城縣治 之西五里갈로개산向酉之原 賜祭典 健廟祠 置守○四人 給復二=結

29

1994년 문익점의 묘역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삼우당 後孫 文龍鎬씨에 의해 발견된 지석에는 建文 2年 6月 일자로 考 좌사의문씨와 ○부인周氏와 합영한 사실과 주씨부인 소생의 두 아들 중용과 중성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로 보아 건문 2년(1440)은 문익점과 부인주씨의 합영이 이루어진 해임을 알 수 있다

30

30) 「家狀」에 문익점의 관력이 상세히 기술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家藏 文書 가운데 敎旨  類와 같은 문서는 집집마다 비교적 잘 보관하는 데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文致昌이 「家  狀」을 찬술할 당시에도 그의 선조 文益漸에게 내려진 교지류의 家藏 문서는 많이 남아있었는  듯하며, 그가 이를 참고할 수 있음으로해서 「家狀」에 문익점의 관력에 대한 내용은 상세히 기  술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는 「家狀」이 신뢰할 수 있는 자료임을 반증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31

태조실록 卷14, 7년 6월 T巳.

 32

 그의 元 使行 시기를 甲辰年으로 기록한 것으로는 李滉의 孝子碑閭記를 비롯해서 「家狀」 발견 이전에 찬술된 碑銘 등에서 그러하다

 33

원에 '書狀官'으로 갔음이 명기된 경우는 태조실록, 문익점 졸기와 曺植의 '廟祠記' 정도에  서 만 확인 된다

 34

고려사卷111, 列傳24, 文益漸

35

『元史』 권46, 本紀 順帝, 22년 12월, "帝以○廢高麗王伯顔帖木兒 立塔思帖木兒爲王 國人上書   言舊王不當廢 新王不當立之故 初 皇后奇氏宗族在高麗 待籠○橫‥‥高麗王遂盡殺奇氏族 皇房謂   大子曰 爾年已長 何不爲我報○‥‥‥

36

高麗史』 권40, 세가 공양왕 11년 12월 癸酉

37

高麗史 권40, 世家, 공민왕 12년 정월 壬寅 및 2월 乙亥 『

38

高麗史』 권40, 世家, 공민왕 12년 3월 壬寅

39

高麗史』 권40, 世家, 공민왕 12년 4월 甲寅

40

吳主煥, 『山淸향토사 p.120

41

삼우당실기 권2 부록 가전

42

삼우당실기 권2, 附錄, 家傳, "先是 國家多○ 西憂紅賊 南患왜구 又見責於元朝 凡前入刻使  臣 一不東還 且春盡而朔不○敎 出而使不至 外內斷絶 疑懼未定 故更使啓稟 ○悟帝心 人皆危之   莫肯行 先生以書狀官如元

43

高麗史』 권40, 世家, 공민왕 12년 4월 甲寅

44

그의 사행 시기와 목적을 두고 볼 때도 그가 덕흥군측에 가담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지만, 이 밖에 고려말 조준이 문익점을 탄핵하면서도 그가 덕흥군 측에 가담하였다는 언급이 없으며, 『태조실록』에서도 마찬가지로 덕흥군과 관련된 그의 행적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덕흥군 측에 가담한 인물로 문익점과 함께 거명되고 있는 金添壽  柳仁雨 康之衍 黃順 安復從 奇叔倫 등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들 가운데 金添壽와 黃順의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으나, 유인우 康之衍 安復從은 덕흥군 측에 실제로 가담하여 공민왕 13년  1월 崔溜가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침입할 때 동행하였다가 잡혀서 죽음을 당하였다. 奇叔倫은   공민왕 20년 8월 에 辛頓의 당이라 하여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가 죽임을 당한 사정이 덕흥군에 부역한 것과는 관계가 없어 기숙운의 경우도 덕흥군과의 관련 여부가 의심스럽다.

45

이 때 문익점이 元에서 받은 禮部侍郎의 관직은 德興君으로부터 받은 僞官이 아니라 元의 벼  슬로 나타나고 있다

46

가장에 의하면 당시 문익점이 덕흥군 쪽에 가담했다는 허위의 사실이 유로되었음이 주목된다 혹 이 때문에 그가 덕흥군에 가담했던 것으로 고려에 잘못 알려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47

朴檢植, 앞의 글에서는 문익점이 南荒에 유배된 사실을 江南 지방에 유람한 것으로 간주하면  목면 종자의 입수 경위가 수긍이 된다고 하여, 그가 공민왕 13년(갑진년) 9월에 귀국, 이듬해에 목면씨를 진양에서 파종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48

朴性植, 金成俊, 吳主煥의 앞의 글들이 모두 태조실록의 갑진 귀국설을 취하고 있다.

49

金成俊, 앞의 글

50

태종실록 권1, 1년 윤3월, "權近上書曰 고 간의대부文益漸 初人江南 覓木棉종자수매 ○來 送於진양村舍 始織木棉進上 是故 木棉之興 始於晋陽"

51

삼우당실기 권3, 附錄, 世宗朝賜墓祭文 및 世祖朝御製賜墓祭文

52

同上書, "臣事恭懲 不貳其貞 焚書諫院 言動天潢 旅食三載 義氣縱橫 潛求嘉種 乃還松京 綿布  之利 衣我群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