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계레의 은인이 된 충군애민(忠君愛民)의 삶

정순태(시사월간 win 편집위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저항한 고려충신이면서도 조선왕조로부터 추앙을 받고 백성들로부터도 사랑을 받았던 인물 -.황금을 돌같이 여기며 외적과 1백번 싸워 전승불패의 기록에 빛나는 최영,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단심가로 유명한 정몽주도 민중들로부터 이사람 처럼 지속적으로 추모 받지는 못했다. 그는 누구일까? 고려사에서는 이 인물의 공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지 몇 자로 소홀하게 적고 있다
사명을 받들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 목면의 종자를 얻어 와서 그 장인인 정천익에게 부탁하여 심게했다. 처음엔 배양하는 기술을 알지 못한지라 거진 말라죽고 단지 한 줄기 만이 살아나 3년만에 드디어 크게 번식했다.

한민족의 행동반경 넓힌 무명문화


 우리 민족의 의(衣) 주(住) 생활을 혁명적으로 진보시킨 목화씨 전래자, 바로 문익점이다. 당시 원나라의 해외유출 금지품이던 목화씨 그 씨앗 10개를 그는 붓두껍 속에 넣어 귀국했다. 그것들 중 하나가 꽃을 피우고 직조기술을 진보시켜 이 땅의 무명문화가 일어난 것이다
문익점의 이전 우리 민중들의 의생활은 비참했다 예컨데 고려사 공민황 13년 1월 임오일 조(條)에는 이런 기사가 나온다.
군졸들은 추위에 떨고 굶주리고 있었으며 도롱이를 몸에 두르고 지내었다.... 죽은 시체가 길에 잇대어있었다. 대오를 떠난 군졸 등이 길에 밀려다니며 걸식했고 그들의 얼굴은 파리했다. 당시 여진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동북면(함경도)으로 출정했던 고려 군인들의 참상이었다. 무명베(면포)가 생산되지 않았던 시절, 우리 민중들은 삼베나 갈(칡넝쿨)포로 옷을 해 입었다. 비단과 모시같은 것은 귀족용이었다. 삼베나 칡넝쿨로 만든 옷으로 겨울을 나기는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겨울철에는 대개는 집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한민죽의 행동반경이 몹시 옹색했다는 얘기다
무명베가 생산된 이후 비로소 한민족의 의관이 그럴 듯 해졌다. 또 솜으로 누빈 이불속에서 편안히 잠을 자게 된 이후에야 생활의 리듬과 활력을 누릴 수 있었다. 백의민족, 이것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위생생활의 혁명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말이다. 흰 무명옷을 입게 되니까 더러움을 타지 않도록 신경을 썼고, 그러다 보니 방안에 도배를 해야만 했다.
목화재배는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번져나갔다. 가을철에 목화를 수확해 놓으면 겨울철 농한기에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아 베틀에 올릴 수 있었다. 겨울철 유휴노동력의 활용, 이것은 국력신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드기어 베틀일 잘하는 며느리가 시집오면 논밭을 산다는 애기가 나돌게 된다.
밭작물인 목화의 재배가 늘어가자 국내의 경지면적이 급속히 늘어난다. 고려 말 국가 장악의 경지가 50만결에 불과했으나 조선 건국초기(1404)에는 거의 두배인 93만결로 늘어났다. 이 같은 경지면적의 배증은 사전정리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면화 등 밭작물 재배면적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까 조선왕조의 역대 임금들도 문익점의 공적에 무심할 수가 없었다.
태종은 그의 즉위연도인 1400년 문익점이 나이 70세로 별세하자 참지정부사(정2품) 충선공으로 추증했다. 태종이라면 고려 멸망 직전 정몽주를 쇠몽치로 쳐 죽이는 등 고려 충신들에게 무자비 했던 이성계의 제5자 방원 바로 그다. 태종을 이은 세종은 역시 명군이었다. 6진개척으로 국토를 확창하면서 남쪽지방의 농민들을 계속 북방으로 이주시키고 특히 목화재배지역의 전국확대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1430년을 전후한 시기의 자료인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려있는 전국 토지결 수는 건국초(1404)의 두배인 1,719,860결에 달했다
세종은 사후 40년이 된 문익점에게 조선왕조가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품계인 대광보국승록대부 정1품 영의정을 추증했다 그의 봉작도 부민후로 높여졌다.
문익점이 목화씨 전래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드물다. 성종17년(1486)께는 왜인이 수입해간 면포가 연간 50만필에 달했다.(김병하, 조선조 전기의 직물생산과 대일수출 경희대 논문집)
왜인들이 얼마나 조선제 면포에 집착했는지는 현 일본 최고 인기작가 시바로타로의 최신작 이 나라의 모양(문예춘추사)에도 잘 나타나 있다. 대 조선무역에서 일본은 조선의 면포를 좋아했다. 일본에서 면은 귀중품으로서, 그 후 도요토미 시대에서도 봉건영주들의 사치품 중 하나였다. 토요토미라면 1592년 임진왜란을 도발한 당시 일본의 집권자. 과대 망상가였던 그가 왜 7년 전쟁을 도발했는지 아직도 그 진정한 이유가 모호한데, 도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사치품이던 조선의 면포가 탐이 나서였는지도 모른다.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면화종자를 얻고 재배법, 직조기술을 배워 간 것은 16세기 중엽이었으나 일반 서민에게 면포가 널리 보급된 것은 17세기 말 부터였다


우리나라 면업사는 대체로 세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는 여말 선초에 해당되는 14~16세기의 성장,발전 기간이며, 2단계는 임진왜란이후 17~18세기의 정체,성숙기로 볼 수 있고 3단계는 19세기 이후의 쇠퇴기다. 따라서 임진홰란 발발방당시인 선조 때는 면화산업이 최고조에 도달했던 시기였다.
특히 15세기 후반기 이후에는 면포가 단순한 상품이라기 보다는 현물 화폐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동전은 주선조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폐로서의 기능이 약했다. 쌀도 중요한 현물화폐이긴 했지만 갖고 다니기에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특히 여행자들은 면포를 등짐으로 지고 다니면서 술,밥값과 숙박비 등으로 셈을 쳐주었던 것이다
임진왜란때 면포가 얼마나 요긴하게 사용되었는지는 운창지(雲窓誌)에 잘 기록되어 있다. 경상감사 김수가 왜적방어용 성을 쌓으면서 규격에 맞는 돌 5개를 가져온 백성들에게 면포 1필씩 지급했다.
더욱 절묘한 애기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전국의 의병들 중에서도 발군의 전공을 세운 의령 출신 곽재우다
왜적들은 붉은색 옷을 입은 곽재우를 홍의장군이라고 부르며 몸시 두려워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궅이 홍의를 입었던 것일까. 당시 조선민가에선 면포와 솜으로 이불을 만들었다. 이불의 바닥쪽은 검은색, 위쪽은 붉은색 면포였다. 흰생이불은 때가 잘뭍어 염색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일어났다. 의병들도 군복이 필요했다. 곽재우장군의 아이디어가 또한 발군이었다. 이불을 띁어서 장교급은 붉은색, 군졸들은 검정색 군복을 지어 입게한 것이다.

이색과 정치적 운명 함께한 배경


문익점은 충혜왕 원년(1331) 경상도 강성현 사월리(현재 경남 산청군 단성면 배양마을)에서 태어났다. 정언(정4품)을 지낸 숙선과 함안조씨 사이의 4형제중 둘째였다. 여덟살에 학당에 들었고 열산살 때 한주(韓州 ;현재 충남서천)에 낙향해 있던 대유학자 이곡(李穀)의 문하생이 되었다. 이것이 그후 문익점의 벼슬길을 파란만장 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곡의 아들이 바로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줄기차게 견제했던 대문장가 이색(李穡)이었기 때문이다. 문익점은 세 살 위인 이색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했다. 문익점은 20세에 경덕재에 들어갔다. 겅덕재는 시경 한가지만 전문적으로 가르치던 국립학당이었다.
엘리트 코스를 거친 그는 23세 때 정동성향시에 급제했다. 정동성향시는 (元)이 고려에다 설치한 종동행중서성 주관의 향시였다. 이어 30세대 문익점은 신경동당시에 응시 급제자 33인중 제 7등으로 뽑혔다. 공민왕 9년 개경 근교의 백악에다 궁궐을 짓고 그곳을 신경이라고 했는데 신경동당시는 신경에서 실시한 제술과(製述科)였다.
공민왕 9년 11월 25일 신경동당시에서 제 1등은 그때 나이 24세엿던 정몽주엿다. 문익점과 동방급제한 사람들 중 정몽주 이외에도 문익점을 논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둘이있다. 바로 제2등 급제자 임박과 제9등 급제자 이정이다 임박은 공민왕 12년(1363) 덕흥군사건의 해결을 위해 원에 파견되었던 계문사 이공수를 따라갔던 서장이라고 고려사에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같은 고려사열전에서 문익점에 대해서도 정언이 되매 사명을 받들어 원에 갔다가 유(留)하여 덕흥군에게 아부하였으나... 운운의 기사가 있다. 그래서 이공수를 수행했던 서장관이 문익점이냐 임박이냐는 역사적 의문이 생겼고 이 문제는 아직도 명확하게 풀리지 않고 있다.
덕흥군은 원나라가 한때 공민왕을 폐하고 고려 국왕으로 세우려 기도했던 제 26대충선왕(1308~1313)의 서자다. 덕흥군 사건은 파란만장했던 문익점의 벼슬길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목화씨 전래의 시기문제와도 관련이 있으므로 뒤에서 재론 하기로 한다

동방급제자들중 또한사람인 이정은 이성계의 경제 제1참모인 조준과함께 문익점의 숙청에 앞장선 인물이다. 다음은 고려사 문익점전에 기록된 관련기사 "그때에 간관 이정등이 사전(私田은 불가하다 하여 다시 상서하여 다투므로 익점이 이색.이림 우현보에게 부의하여 병을 칭탁하고 서명하지 아니한 채 익일에 바로 서녕네 나아가니 대사헌 조준이 탄핵하기를 ... "  위의 기사는 이성계 파에서 조선왕조 개국의 물적 토대가 되었던 전제개혁에 문익점이 반대했다는 얘기다. 바로 이 때문에 문익점의 벼슬길이 막혀 버렸다. 이 대목도 그의 인물사 연구에 있어서 핵심부분, 역시 글의 흐름상 뒤에서 재론하기로 한다.

신경당동시에 급제한 문익점의 첫보직은 김해부사록이었다 사록이라면 지금의 부군수에 해당하는 정8품의 외직 썩 화려한 출발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순유박사로 발탁된다. 순유박사라면 유교교육을 관장하는 성균관의 종7품 벼슬. 문익점의 벼슬은 거듭 올라 33세에 사간원의 좌정언에 이르렀다 사간원이라면 황에게 간(諫)하는 것을 업무로 삼는 봉건왕조의 핵심기관이며 좌정언은 이기관의 정6품이다. 이무렵 고려와 원사이엔 일대 사건이 벌어져 관계가 몸시 험악해 졌다. 원나라가 공민왕에게 내린 인수를 회수하고 충선왕의 셋째아들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책봉해 버린 것이다. 이같은 원의 행동은 공민왕이 1356년 친원파로서 악행을 일삼았던 기철일당에게 피의 숙청을 단행하고 원나라가 설치했던 정동행성이문소를 혁파, 구토회복 정책을 감행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덕흥군에게 아부했다는 고려사의 기록


기철은 원 순제의 세자를 낳은 기황후의 친정오빠였다. 원은 기철의 목을 벤 고려의 처사에 분노했다. 때마침 고려 출신의 최유가 원나라 조정에 붙어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을 옹립하고 본국에 대해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이 모의에는 원의 승상인 삭사감 고려출신의 내시관 박불화 등이 가담 기황후와 원순제를 움직였다. 공민왕은 원 순제에게 헌첩사, 하정사, 하성절사 등 사절단을 파견 문제해결에 나섰다 그러나 원 조정은 고려의 사절단 중 한사람도 본국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억류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민왕 12년 3월 찬성사(정이품) 이공수를 정사, 허강을 부사로 하는 계품사를 워나라에 파견했다. 이때 사절단의 서장관으로 수행한 인물에 대해 임박설과 문익점설이 있다. 서장관이라면 사신들 중 문서기록 및 그 처리에 관한 일을 맡는 핵심적 포스트로 장사, 부사에 이은 랭킹 3위의 직이다. 누가 계품사의 서장관이었느냐는 문제를 놓고 그때 서장관이 2인 이었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공민왕 12년 3월의 서장관은 임박, 동년 4월의 서장관은 문익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고려사 공민왕 12년 4월 갑인일 조(條)에는 밀직상의 홍순, 동지밀직사 이수림을 원나라에 보내어 배고간기로서를 원나라의 어사대에 제출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어떻든 이공수. 임박 등은 목숨을 걸고 공민왕을 변호했던 반면 문익점은 부역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와 관련 고려사 문익점 전에는 덕흥군에게 아부하였으나 덕흥군이 핍(貶)함에 미쳐 이에 돌아왔는데 목면의 종자를 얻어서 돌아와서...라고 쓰여있다.

위의 잛은 구절이 두가지 중요한 시비를 낳고 있다. 과연 문익점이 덕흥군 편에 붙었는지에 관한 의문과 그의 귀국 연도에 관한 엇갈린 해석의 문제제 고려사의 기록은 문익점이 남긴 시문과 후인의 평가 남평문씨의 가전등을 묶어 편찬된 삼우당실기의 내용과는 정면배치된다. 실기에 따르면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하라고 원나라에서 부여한 벼슬을 끝내 거부 원순제의 노여움을 받아 덕흥군의 집에 42일간 구류를 당한 끝에 교지(베트남 하노이)로 3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그래서 문익점의 귀국연도는 고려사에 의하면 정사 이공수가 귀국한 1364년 10월 일 터이고 실기에 의하면 1367년의 일이다. 문익점의 귀국연도는 바로 목화씨의 전래년도가 언제냐는 문제와 직결된다.
조선조에 완성된 고려사이 기록은 조선왕조가 개국에 저항한 고려 왕가 및 충신들을 깍아내린 대목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실기는 남평문씨 후손들이 편찬한 것으로 선조미화의 의심이 간다는 점에서 모두 그 신뢰도가 100% 확보되기 어렵다. 덕흥군 옹립사건은 결국 고려측의 승리로 매듭지어졌다. 최유는 원의 요동병 1만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의주를 포위, 한 때 군세를 떨쳤으나 1664년 최영, 이성계 등에게 패하여 원나라로 도주했다. 요동군이 패하자 원의 대 고려정책은 180도로 돌아섰다. 원순제는 덕흥군을 귀양에 처하고 최유는 고려로 쫓아 보냈다. 원에서 덕흥군 측에 가담했던 최유와 그 추종자들도 고려로 묶여와 참수되었다. 그때 문익점이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실기에 의하면 그때 문익점은 교지의 귀양지에서 운남풍토집을 저술했다고 되어있다. 이책은 서명만 전해지고 있다.

목화씨의 전래 연도의 1364년설과 1367년설


그렇다면 문익점은 공민왕을 배신한 역신이 아니라 충신이다. 조선조 태종이 전교에서도 문익점은 고려충신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런 대목 등으로 미루어 보면 문익점이 교지로 이양을 갔거나 적어도 강남지방을 어떤 이유에서든 여행했다는 얘기에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이와 관련 경상대 한국사 교수 박성식는 당시 목화(1년생 초면) 재배기술로 미뤄보면 북위 38도 이북에서의 목화재배는 어려웠다고 전제 문익점이 북위 40도가 넘는 북경(당시대도)지역에 머물러 있었다면 목화씨를 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기에 따르면 문익점은 37세 때인 1367년 2월 귀국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가 덕흥군을 지지 했다는 혐의로 귀국과 동시에 파직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문익점을 폄한 고려사에서도 귀국 직후 파직의 흔적은 없다. 5년만에 귀국했으므로 노부모를 공양하겠다는 명분으로 휴가를 얻었다고 한다. 문익점의 환로(벼슬길)에는 공백기간이 많다, 중국에서3년간 귀양살이 한 데다 부친상과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씩 시묘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1375년 공민왕이 침실에서 측근들에게 피살되었다. 공민왕은 국권회복등 볼 만한 치적이 많았으나 왕후 노국공주가 요절한 후 성질이 돌변했다. 말기에는 자제위란 미소년집단을 곁에 두고 남색에 빠지는가 하면 자신의 비들을 총신과 교접하도록 하는 등 괴상한 짓에 빠져 들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고려판 10.26사건이었다

우왕원년(45세)에 문익점은 전의주부를 제수받고 다시벼슬길에 나섰다. 정의주부는 국가의 제사와 벼슬아치의 시호에 관한 일을 맡는 정의사의 정 6품관이다. 곧이어 문익점은 배원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청도현령으로 좌천당했다. 함게 상소한 정몽주도 언양현령으로 쫓겨갔다. 우왕 즉위에 공을 세워 정권을 장악한 이인임 등이 다시 친원정책으로 돌아섰는데 문익점, 정몽주 등의 원의 사신을 축출하라고 청원하다가 탄핵을 받았던 것이다(실기)
문익점은 청도현령에 재직중이던 우왕 2년 겨울 모친 함안조씨의 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시묘살이 중 왜구가 쳐들어와 마을 사람들이 모두 피난을 갔는데도 문익점만 홀로 묘를 지켰다. 이에 왜구들도 감탄 勿害孝子(효자를 해치지 말라)는 팻말을 세워놓고 철수 마을 전체가 왜구이 분탕질을 면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문익점은 왜구 토벌에 나섰던 이성계가 위로차 문익점을 찾아가 만났다. 이성계는 이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듯 아들 방원(후의 태종)에게 문익점은 의로운 선비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왕9년 동북면병마사이던 이성계는 문익점의 효행을 표창하라고 왕에게 청원했다(실기)
지금 상제(喪制)가 무너지고 느저러져서 이름있는 사대부라 할지라도 다 백일에 탈상을 하는데 익점만은 부모의 묘를 지킴에 슬퍼하는 예를 갖추어 극진히 하여 바다의 오랑캐들로 하여금 효도에 대해서 감복케한 자취가 있습니다. 풍속을 도탑게 하하고  세상사람들을 교화시킨 그이 아름다운 행실은 마땅히 표창하는 명이 있어야 하옵니다. 이에 우왕은 이성계의 주청에 따라 문익접이 고향마을에 효자리라는 이름을 내리고 효자비를 세우게 하였다
이무렵 그는 몇간의 초옥을 지어 현판에다 삼우당(三憂堂)이라고 써 붙이고 삼우거사라 칭했다. 왕국이 떨치지 못함을 근심하고 성인의 학문이 전해지지 못함을 근심하여 자신이 도가 확립되지 못했음을 근심한다는 것이 아호에 담긴 뜻이다.
우왕 14년(1388)에 이성계, 조민수의 쿠테다(위화도회군)로 8도도통사 최영이 참수되고 우왕은 강화도로 쫒겨갔다. 우왕의 아들 창앙이 대통을 이었다. 이때 신흥세력 이성계와 구가세족인 조민수의 견해가 엇갈렸다. 파워게임을 벌인끝에 창왕옹립을 주장한 조민수측이 이색의 지원으로 일단 승리했다.
이에 이성계파의 반격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창왕즉위 다음달 이성계의 심복인 대사헌 조준이 전제개혁에 관한 장문의 상소를 올려 정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때 수상직에 있던 조민수가 전제개혁을 막으려 했다. 이에 조민수는 조준에게 탄핵되어 창녕으로 귀양 갔다. 이어 이색이 문하시중이 되고 이성계가 부수상격인 수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도총중외제군사가 되어 실제에 있어서는 군사상 정치상의 최고권력을 장악했다. 이로부터 이성계 중심의 신흥군벌 세력은 구세력을 배제하여 고려정국은 그 일파의 독무대가 된다. 바로 그무렵(창왕 원년 가을) 58세의 문익점은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에 제수되었다. 왕을 곁에서 보좌 의견을 피력하는 종3품의 포스트였다.

이성계 대두 막기 위해 전제개혁 반대


창왕2년(1389) 강화로 귀양 갔던 우왕의 복의모의가 드러났다. 이성계 일파는 창왕의 아버지 우왕이 원래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라고 꾸며 창왕도 왕자리에서 몰아내고 공민왕의 먼 일가이며 이성계 자신의 인척이기도 했던 왕요를 세월 공양왕으로 삼았다. 바로 공양왕 원년에 문익점은 대사헌 조준에게 탄핵되어 조정에 쫓겨났다. 이때 탄핵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익점은 본시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는 몸으로 진주의 구석땅에서 몸소 밭을 갈았습니다. 전하께서 현량으로서 불러 간대부를 주어 좌우에 두고 좋은 물음의 상대로 삼으시었으니 진실로 마땅히 충언을 올리고 치도를 개진하고 성치를 보좌하여야 하는데도... 허리를 굽히고 손을 맞잡고 오직 지당하다고만 하였습니다. 근일 동사랑 오사충, 이서는 각자 상소하여 시사를 극언하는데 익점은 가진 녹을 잃을까 걱정하여 한말도 언급한 바가 없습니다. 또 상사랑이 연명상소하여 전제를 극론하는데, 익점은 권세에 아부하고 병을 칭탁하여 출근하지도 않아 그 의론에 참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마땅히 그 직위를 삭탈하여 전야에 쫓아내 언책에 있으면서도 말하지 아니하는 자의 경계로 삼으소서.   구구절절 대단한 인신공격이며 모략이었다. 문익점은 쫓겨났다. 이때는 이색. 이림. 우현보 등 고려충신들도 모두 탄핵되어 귀양을 갔다 이림은 창황의 장인이었고 우현보는 우황의 복위기도사건에 연루되었다. 이미 우왕, 창황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이색과 이성계와의 관계는 매우 흥미있는 대목이 많다 원래 두사람의 정책노선은 공통점이 많았다. 둘은 우왕 초기 부패한 집권세력이었던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을 제거하는 데에선 최영, 정도전, 조준 정몽주는 학자 출신의 관료로서 사전 정이를 강력히 주장하는 논리를 전개했다. 구세력이 대농장을 없애고 사전을 정리하여 공전을 늘림으로서 국가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들은 또한 대외관계에서도 신흥 명에 접근하자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와 이색계열은 속셈과 목표가 서로 달랐다 이색계열의 목표는 고려왕조의 부흥이었던 반면 이성계일파의 속셈은 역성혁명이었다. 따라서 이색 계열의 문익점이 조준, 정도전 주도의 전제개혁을 반대한 것은 고려 충신으로는 당연한 행위였다.
이성계 파는 반대파의 리더 이색을 귀양에 처하기는 했지만 죽음으로 몰아 넣지는 못했다. 이색의 명망이 국내외 적으로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색의 지모도 대단했다. 문하시중 이색이 창왕시절 왕의 입조 교섭차 명나라로 들어가면서 굳이 이성계의 아들 방원을 서장관으로 수행시킨 것은 음미해 볼 만한 대목이다. 그의 부재 중에 쿠대타를 할 수 없도록 방원을 인질삼아 데려간 것이었다.
또한 창왕의 입조교섭에 성공했다면 이성계의 야망을 꺾어 고려왕실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색이 추진한 입조교섭은 그 진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명태조 주원장의 거절로 실패했다. 이색과 이성계의 인간적 맞대결도 볼 만했다. 귀양지를 전전하다 돌아온 이색과 이성계의 대면이 그 하이라이트다. 이색은 이성계의 집에 불쑥 찾아갔다. 이성계는 이색을 상좌에 모시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술잔을 올렸다. 이색은 선 채로 술잔을 기울인후 이성계의 집을 곧장떠났다. 이색의 기백이 드러난 이 대목을 고려사에서는 무례한 짓으로 표현했다. 이 무렵이면 이성계의 위력은 이미 왕을 앞질러 있었다.
어떻든 이색 계열의 문익점이 생명을 부지한 것만해도 다행이이었다. 공양왕 2년 8월 낙향했던 문익점이 다시 상경 전직에 복귀했다가 3개월후 다시 사임했다, 거리에서 문익점의 낙향을 지켜본 사람들 중에서 문공은 조정을 떠나는데 외로운 정공은 어찌할 것인고 하는 탄식이 나돌았다고 한다. 정공이란 정몽주를 가리킨 것이다(실기)

전제개혁을 둘러싼 시비가 불꽃을 튀겼을 때 정몽주의 태도가 대단히 절묘했다. 창왕 원년(1388) 7월 조준의 사전개혁안을 도당에서 논의케 되었는데 "시중 이색이 '가벼이 구법을 고치는 것이 불가하다' 하매 이림. 우현보. 변안렬과 권근.유백년 등은 이색의 의견에 찬동하고 정도전. 윤소종은 조준의 주장에 가담하였으며 정몽주는 양편에서 미결의 태도를 취했다." 이처럼 정몽주는 용의주도했으며 때를 기다렸다.
그것은 공양왕 4년(1392) 3월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중상을 입자마자 정몽주의 전광석화를 방불케한 행동에서 드러난다. 정몽주는 재빨리 간관 김진양 등에게 "먼저 이성계의 우익을 잘라 버리고 그런 뒤에 이성계를 도모하자"고 했다. 그래서 조준. 정도전을 비롯 윤소종. 남재. 조박 등의 직첩과 공권이 몰수당하고 특히 조준. 정도전 등은 원지에 유배되었다.
이때 이성계는 벽란도에 옮겨져 치료중이었는데, 이방원이 달려와 "정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고했다. 이에 이성계는 야밤에 교군을 타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방원은 장사들과 모의, 정몽주를 제거하려 하니 이원계(성계의 형)의 사위인 변중량이 그 모의를 정몽주에게 귀띔해주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문관답지 않게 담대호탕했다. 정몽주는 동태를 살피기 위해 이성계의 집으로 문병을 빙자, 찾아갔다. 돌아오던 길에 길목을 지키고 있던 이방원 수하의 자객 45명에게 쇠뭉치로 얻어맞고 절명했다.
정몽주의 죽음은 곧이어 고려 멸망에 연결되나 "만고충신"의 이름을 남기게 했고, 그후 8년을 더 살아 70세에 병사한 문익점은 명철보신의 길을 따르면서 무명문화의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김시습.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 조식. 이황. 이지함. 김장생. 이수광. 송시열 등 조선조 일류 인물들은 모두 문익점을 기리는 시문이나 비문을 썼다. 특히 송시열은 문익점을 안향과 더불어 우리나라 성리학의 조종이라고 흠모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종으로부터 정조까지 문익점의 공적에 감사하는 왕의 전교만 해도 14회에 이른다.
문익점을 문묘에 배향하라고 청원하는 선비들의 상소만 해도 4번이나 올라갔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의 임금들은 문익점을 문묘에 모시는 것만은 끝내 거부했다. 유교국가의 선비들로서는 공자와 함께 문묘에 배향되는 것이 지상.지고의 영광이다. 물론 오늘의 관점에서는 문익점이 문묘에 배향되었다고 그의 공로가 더욱 높이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소득 1만달러 시대의 주춧돌 쌓은 사람


문제는 문묘 배향을 거부한 이유에 있다.
남의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금지사항인 목화씨를 반입시킨 것이 선비로서 떳떳하지 못했다는 판단이 그 이유였다. 왜냐하면 목화씨를 문익점이 붓두껍 속에 숨겨온 것이 아니고 무심코 소맷자락 속에 넣어왔다는 등의 "문익점을 위한 변호"(?)까지 대두되어 논란을 밎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조선왕조의 한계였다. 알맹이 없는 명분주의가 실용주의를 눌러버린 꼴이다. 그런 상황에서 면업은 조선왕조의 하대로 갈수록 위축되었다. 면직산업은 가내수공업에 머물렀던 것이다. 근대적 산업혁명을 추동하는 지도력도 없었다. 봉건왕조의 수탈체제로 인해 면직물의 질적 향상에도 소홀했다.

그럼에도 우리 여성들의 길쌈솜씨는 체화되어 대를 이어 전승한 것만은 틀림없다. 우리 여성들의 길쌈솜씨를 근대적 공장제 산업에 동원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제국주의 일본이었다. 20세기 초 일본 자본주의의 견인차는 관서지방의 방직산업. 이 때문에 우리 여성들은 무수히 오사카 등지의 방직공장 여공으로 끌려갔고, 이것이 또 오늘날 70만 재일동포의 모태가 되었다.
8.15해방 후 한국의 목화재배는 세계시장을 지배해온 미국산 면포에 밀렸고, 이제 국내에선 시배지 몇군데를 제외하고는 명맥조차 끊어졌다. 고임금 체제 속에서 목화 재배는 상업성도 없다. 한여름의 흰색, 붉은색, 노랑색, 분홍색 목화꽃, 그리고 들판을 뒤덮었던 초가을의 흰색 목화송이는 추억속의 정경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문익점으로부터 비롯되어 우리 여성들에게 체화된 면직산업은 개발연대 한국의 도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60-70년대 한국 경제성장의 1등공신은 수입면을 가공한 섬유산업이었고, 그 주역은 우리의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인이 1인당 소득 1만달러를 구가할 수 있게 된 주춧돌을 문익점이 쌓았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