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접의 후대의 평가와 현창활동

김준형 경상대학 교수


머 리 말
고려말 삼우당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앗을 가져와 우리 나라에 번식식시킨 것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에 상당한 영항를 미쳤다 조선시대의여러 지식인들도 지적했듯이 그것은 당시의 의관문물을 크게 바꾸었다. 그래서 후대의 유명한 인물들의 이에 대한 칭송이 줄을 이었다.

그동안 문익점에 관한 연구와 평가가 이루어 지긴 했지만 본격적인 연구를 시도한 글은 극히 일부에 그친다 1)
그것도 그가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씨앗을 가져와 우리나라에 퍼뜨린 과정에 집중하거나 그의 정치적 행적에 관한 것을 주로 언급한 것이있다. 조선왕조 전시대에 걸쳐 문익점의 행적에 대해 평가하거나 그에 대한 현창활동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거의 없었다. 
이번의 학술대회에서는 문익점의 목면전파 과정 및 그것이 우리 사회와 인근 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분석과 함께 그의 행적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시도하는 것이다. 이에 대응해서 필자는 조선왕조 전시대에 걸쳐 당시 지식인들이문익점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현창하려고 했던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문익점이 세상을 떠난 후 후대의 인물들이 문익점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 왔던가 하는 것과 국가 및 관에서는 문익점에 대해 어떤 褒典을 베풀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 보려고 한다.
다음에는 문익점에 대한 현창을 위해 자손들과 지역 사림들이 어떤 활동을 해 왔는가를 실기간행과 증보, 서원 건립?청액운동과 문묘종사운동, 부조묘 복구운동 등을 통해 살펴보고, 지역 사림들증에서도 특히 문익점의 고향인 단성의 사림들이 별였던 적극적인 활동의 내용을 분석해 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실기조차 없어서 조선시대 내내 문익점과 관련된 단편적인 내용만 당시사람들에게 전해졌을 뿐이지 그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가 없어서 그에 대한 존승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포전이나 후대 인물의 평가가 많이 나을 수 있었던 것에는 자손과 인근 사림들이 그를 알리기 위한 노력이 일정한 기여를 했던 점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가 주자료로 이용한 것은 1900년에 편찬된 『三憂堂實記』이다 이 실기가 나오기까지 문익점과 관련된 문헌은 여러 차례 증보되면서 이름도 『忠宣公行蹟記』(1766), 『江城君事實錄』(1788)에서 1818년부터는 『삼우당실기』로 바뀌고 1870년에는『道川院蹟』도 만들어졌다.필자는 이중 『강성군사실록』과 『도천원적』도 참조하였다. 2)
이외에 19세기 중반 도천서원에 간여하였던 李邦儉(1798-1865)의 『道淵端言』 과 1640년에 만들어진 李時○(1588-1663)의 『雲窓誌』도 중요 자료로 이용하였다.

 

          1. 문익점에 대한 후대의 평가

삼우당 문익점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역대 여러 인물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이중에 退溪 李滉混이 평가했던 부분을 장황하긴 하지만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江城諦 남쪽에 있는 培養山里는 전 왕조 때 사의대부였던 文公이 살던 옛터이다.마을 가운데에는 효자비가 있는데, 洪武 16년(1383)에 조정에서 공의 효행을 기려 세우도록 명한 것이다. 원래 공이 모친상을 당해 산간에 있었는데, 왜구의 기세가 등등하여 지나는 곳마다 무참하게 짓밟아서 인민들이 도망하여 숨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 공은 홀로 상복을 입고 제물을 바치고 그 앞에 엎드려 소리내어 울며 맹세코 그자리를 떠나지 않으니, 적들도 감탄하여 효자라 칭하고 해를 입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모친의 영전이 참화를 면할 수 있었다

 

②공의 功이라 하는 것은, 至正 甲辰年에 공이 일찍이 사신을 모시고 원나라에 들어가 나라의 일로 남방의 거친 곳으로 귀양갔다가 풀려 돌아오면서, 길에서 목면 씨앗을 입수하고 백성들을 이롭게 함이 급하기에 가져오는 것을 금지함을 무릅쓰고 주머니에 넣어와 온 나라에 번식시켜 만세토록 길이 덕을 입혔으니, 이것이 公의 공인 것이다. ---이것이 나라 안에 가득히 퍼져 유통된 것은 결국 그 공이 五穀六財와 같은 것이니, 三韓의 많은 백성이 파리해지고 어는 것을 면할 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국의衣冠文物을 환하게 일신시켰던 것이다 그런즉 우리 왕조가 추가로 은덕의 명을 내린것은 헛된 은전이 아니라 마땅한 일이었다.


③그리고 공의 효성은 생사의 갈림길에 임해 나타났었고 박탈할 수 없는 절개는 곧 국조의 혁명으로 모든 것이 바꾸어진 때에 두 마음을 갖지 않았던 것에서 알 수 있는것이다. 이런즉 공이 만년에 병을 칭하고 벼슬하지 않았던 것은 곧 또한 일찍이 고려를구해낼 수 없음을 알아보았던 것이었으므로 미리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중간에 비록 일차 벼슬길에 나가기는 했지만, 그것도 국조가 바뀌기 전이었는데 趙俊이 일시적으로 남의 흠을 잡는 말을 한 것이 어떻게 공을 더럽힐 수가 있었으랴. 내가 염려하는 것은 공의 큰 절개가 이에서 더 나타났건만, 세상에서는 혹 이것을 알지 못할까 하는 것이다
3) ②의 부분에서는 문익점의 목면전래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을 언급하고 있다.
즉 면포가 우리 사회에 퍼진 것은 오곡을 경작하는 법과 토,금,석 화,피, 초 와 같은 기물의 재료를 다루는 법이 처음 창안된 것과 같은 공헌을 하였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의 많은 백성이 추위에 떨고 얼어죽는 것을 면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국의 衣冠文物을 새롭게 일신시켰다고 극찬하고 있다.

①과 ③의 부분에서는 그가 솔선하여 유교적 기본덕목의 하나인 효행과 왕조에 대한 절의를 실천했다고 하며 도학적 입장에서의 그의 공헌을 칭송하고 있다. 이곳에서 이황은 趙浚이 문익점을 탄핵했던 부분을 언급하면서 이것은 조준이 일시적으르 문익점을 헐뜯은 말에 지나지 않고 그의 절의에 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문익점은 공양왕 때에 간쟁을 맡은 사의대부로 있으면서 이성계를 중심으로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열려는 세력들과 대립하고 있던 온건개혁파 즉 목은 이색 등과 연대하여 과격한 사전개혁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런 입장은 곧 이성계 일파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으며, 결국 그 일원인 조준의 탄핵을받아 그는 파직되었던 것이다. 4)

  새 왕조가 개창된 직후에도 문익점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다만 목면 전래라는 것이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이 워낙 심대했기 때문에, 이 부분의 업적이 일부 논자들에 의해 계속 제기되면서 국가로부터 여러 가지 은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성리학적 대의명분론이 강화되고 전왕조 고려에 대한 충절의 행적을 남긴 인물들을 중시하는 사림파들이 발언권을 점차 강화해 나가는 조선 중기에 이르면서, 문익점의 충절에 대해서도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서 이황의 이런 평가가 나오게 된 것이다.

 

  조선 후기 숙종대에 정계와 사림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우암 宋時烈도 문익점의 목면 전래의 사실을 들어 그는 동방의 后稷과 같다고 평가하였고, 또 程子, 朱子가 죽은 후 우리 동방의 安裕와 문익점 두 현인이 그 도를 잘 전수하였으니 두 분 이 아니었으면 우리 등방은 오랑캐 문화에 빠지는 것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극 찬하였다. 5)

  이외에도 조선시대 많은 유명 인물들이 詩章을 통해 그의 목면 전래의 공적과 충효의 행적을 칭송하고 있다 그 예로는 문종 때 좌의정을 지낸 南智, 傭齋 成俔(1439-1504), 梅月堂 金時習(1435-1493), 점필제 金宗直(1431-1492), 정여창(1450-1504), 寒暄堂 김굉필(1454-1504), 梅溪 曺偉(1454-1503), 慕齋 金安國(1478-1543), 思齋 金正國(1485-1541), 文山 柳洵(1441-1517), 南冥 曺植, 비隱 이규보 율곡 이황(1536-1584), 土亭 李之函(1517-1578), 沙溪 金長生(1548-1631), 秋浦 黃愼(1562-1617), 竹林 卓中, 芝峯 이지광(1563-1628), 學沙 金應祖(1587-1677), 판윤 姜世晃(1713-1791), 승지 兪恒柱, 승지 姜연, 단성현감 채○일蒙腐一, 진사 朴정원 등을 들 수 있다. 6)

 

         2. 국가 및 관의 褒典

국가로부터의 포전은 그가 살아 있을 당시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가 여묘살이했던 효행이 알려지자 우왕 9년(1383)에 조정에서는 안렴사 여극인과 고성군사 최인복을 보내 문익점이 살던 마을인 배양리에 효자비를 세우게 하였다. 7)
그러나 이 당시에는 비각을 외우지 않아 오랫동안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같다. 權潗(1569-1633, 호 ?翁)의 '孝子碑閣重修記'에 의하면 비를 세우던 당시에 비각도 세운 것으로 보고 있지만,
8)
그 이전에 쓰여진 이황의 '효자비각기에는 명종18년(1563)에 와서 당시 단성현감 안전이 이런 상테에 놓여 있는 것을 알고 비를 보호하기 위해 자금을 모아 비각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9)
그 이후 임진왜란으로인해 비각이 소실되자 광해 15년(1623) 당시 단성현감이던 이원길이 앞장서 효자비각을 중건하였다.
10)

또 조선왕조에 들어와 정종 2년(1400) 문익점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祭間을 내리고 墓祠를 건립하게 함과 동시에 守塚 4인을 두어 묘를 지키게 하고 復戶 2결을 내려주었다. 11)
이로부터 150여년 이후인 명종 16년(1561)에도 문익점의 증손녀 문씨가 감사에게 청원해서 묘사를 중건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문씨의 손자 李源이주도하고 수령 成遵이 협력하여 묘사와 제전을 늘렸다. 이때 묘사 기문을 쓴 사람은 南冥 曺植이었다.
12)

  문익점에 대한 贈職과 封君 등의 조치도 이루어진다. 태종 원년(1401)에 와서는藝丈館 提學을 증직하고 江城君으로 봉하였으며 시호를 忠宣이라 했다. 그리고 문익점에 대한 不조廟를 세우게 하여 祭田 100결과 奴婢 70구를 하사하고 복호도 내려주었다. 세종 22년(1440)에는 영의정을 추가해 증직하고 富民候로 봉하였으며, 南智로 하여금 치제하게 하였다. 13)

  이후 역대 왕들은 문익점에 대해 賜祭文을 내리고,14)
또 십여 차례에 걸쳐 傳敎를 내려 자손에 대해서는 특별히 채용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와 일반 군역에 충정되지 않도록 하는 조치가 계속 지켜지게 하였다.
15)

  세조 7년(1461)에 오면 국가의 명에 의해 문익점의 고향인 丹城脚에 祠宇도 건립된다16)
후대에 전라도 유생 金相樞 등이 올린 上言에는 태종때 서원을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주장은 잘못된 것일 것이다. 아마 부조묘를 서원으로 잘못 착각한 것 같다 강성군, 부민후로 봉한 시기도 앞에서 필자가 언급한 것과 차이가 있다.
17) 
사실 태종 10년(1410)에 사간원에서 문익점을 위한 사우 건립을 요청한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의정부에서 이에 대해 논의한 결과, 이미 여러 가지 포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우 건립은 잠시 유보해야 한다고 건의하여 이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18)

 

문익점 사우의 건립이 조정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세조 2년(1456)에 가서였다. 이때 집현전 직제학 梁誠之가 목면을 전래한 문익점과 화포제작에 공헌한 崔茂宣의 사우를 각각의 관향에 건립하고 관에서 춘추로 제향하도록 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 건의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19)

 그러나 이 도천서원이 정식으로 건립되어 제향이 시작된 것은 국가의 승인을 받은지 몇 년 지난 1461년이었다. 처음 사우를 건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지원이 있기는 했지만, 건립장소를 선정하거나 단성 사림, 문익점 자손의 재정적 협조 등을 조직하고 구체적으로 사우를 건립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도천서원은 사림들에 의해 몇 차례 중건되고 이건되면서 서원 사액 또는 복액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원래 국가의 명에 의해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액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임란 이후 소진된 도천서원을 복구한 이후 단성지역 사림들은 점차 다른 사액서원과 마찬가지로 도천서원에도 사액이 내려져야 한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뒤에 언급하듯이 숙종 34년(1708) 朴恒泰를 비롯한사림들이 상소해 사액을 청하는 등, 청액운동이 여러 차례 전개되었고 마침내 정조11년(1787)에 도천서원이 사액되었다

  도천서원과 관련하여 碧溪影堂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삼우당실기』의 연보에는중종 6년(1511)에 벽계영당이 咸陽에 세워지고, 명종 22년(1567)에 가서 사액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20)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사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丹城違院記'를 섰던 박사휘(1689-1776, 호 ?窩)에 의하면, 正德年間(1506-1526)에 단성현에 벽계서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근거 자료가 없어 확인할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익점 후손 문희석의 기록에는 문익점을 모시는 서원이戒湯 碧溪에 있다고 되어 있고 文允明의 上言 중에는
21)
문익점의 行狀이 함앙의 벽계서원에 있다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잘못 파악하고 있기는 하지만, 박사휘는 단성현이 함양에 속해 있던 적이 있어서 그런 언급이 나오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
22)
  실기의 연보에는 문익점이 I5세 때인 忠목王 元年(1345)에 '함양의 碧溪山堂에서독서했다' 라고 기재되어 있어 함양에 서원이 건립된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박사휘가 살았을 때나 지금 현재에도 함양에는 '벽계'라는 지명을 찾을 수가 없다. 반면에 단성에는 벽계라는 곳이 있다. 李時○의 『雲窓誌』에 의하면, 이곳에는문익점의 조카였던 文可學의 독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23)
이로 보아 이곳은 문익점과도 관련있는 곳이 아닌가 추측된다. 따라서 박사휘가 의문을 제기했던 것처럼 이곳에 문익점의 사우가 세워졌다가 뒤에 도천으로 옮겨져 중건된 것이 아닌가 하는추측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문익점과 관련된 서원중에 사액된 곳으로 전라도 장흥의 江城祠를 들수 있다. 강성사는 원래 月川祠라 불리고 있었고, 문익점의 9세손인 楓菴 文緯世(1534-1600)를 제향하기 위해 인조 22년(1644)에 세운 사우였다. 24)
문위세는 퇴계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전라도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 명망있는 인물이었다.
25)
그런데 영조 9년(1732)에 월천사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배려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문익점이 추가로 제향되면서 이름도 강성사로 바뀐 것 같다.
26)
이 서원도 전라도유생들의 상소가 제기되면서 정조 9년(1785)에 사액이 내려졌다.
27)

 

자손과 사림의 현창활동
1. 실기 간행과 증보

이러한 국가의 은전과 후대의 유명 인물의 평가가 많이 나을 수 있었던 것은 문익점이 끼친 공헌과 행적으로 보아 당연하였지만, 그의 자손들과 단성을 비롯한 여러 관련 지역의 사림들이 그를 현창하기 위해 노력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  자손과 사림들은 문익점을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문익점이 어떤 인들인가를 알리기 위해 중요한 것은 그의 문집이나 실기를 간행하는 것이었다. 문익점과 관련된 문적은 대부분 유실되있다.
文可學 사건 이후 자손들이 단성에서 다른곳으로 흩어져버리고 단성에는 별로 남아 있지 않았던 것과 부조묘를 모시는 사손의 대가 오랫동안 끊긴 것도 그 중요한 원인이었다. 또 임진왜란 등 병화로 인한 소실도 그 한 원인이었다

  다만 증손 사헌부 감찰 致昌이 세조 10년(1464)에 지은 家傳(事責本記)28)가 있었지만, 이것도 도중에 유실되어 버리고 세상에 공개되지 않고 있었다. 29)
  이보다 악 250년 이후인 숙종 34년(1708)에 고향인 단성에서 향부로들이 명현들이 기록해 놓은 문익점 관련 글들을 토대로 行蹟記를 만들었으나, 이것도 영조 40년(1764)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1766년에 도천서원 원임을 맡고있던 朴思徽(박사휘) 등 단성 사림들이 다시 '忠宣公行蹟記'를 만들었다. 역대 왕들의 褒贈으로 관찬사서 및 고려사에 실려 있는 것, 선현들이 기록해 놓은 것, 文氏族譜, 勝覽 등에 실려 있는 것 등을 참고하여 내용을 구성했다.
30) 
도천서원 사액 직후인 정조 12년(1788)에는 장흥의 강성사에서도 후손 泳光이 주도하여 『忠宣公功行錄』(江城君事實錄)을 간행하였다.
31)
여러 가문에 소장된 문익점과 관련된 글을 모아 편집하였는데, 강성사에서 편찬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江城祠圖와 문위세의 행장도 추가했다. 그러나 행적기나 공행록은 모두 얼마 안 되는 자료를 토대로 편집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실들의 시기와 연월이 다르고 내용이잘못된 것이 많았다.
32)

 그 이후 순조 8년(1808) 족보간행 때 文致昌이 1464년에 찬집한 家傳이 유실되었다가 섬에 살던 후손에게서 발견되었다. 33) 이를 계기로 17대손인 桂恒 등이 본격적으로 관련 문적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는 1817년에 서울에서 공사서적을 참조하고 차이가 나거나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삼우당실기』를 편집하였다 당시의 명망가였던 金庭堅, 洪永燮, 吳羽常, 閔泰鏞 등을 찾아가 편차를 바로 잡아 줄 것을 요청하고 예조판서 金義淳, 공조판서 洪義浩 등에게는 서문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1818년 겨울 하동에서 인쇄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봄에 종결하였다. 이 작업에는 계항뿐만 아니라 관산의 泳光, 만성의 鍾九, 장흥의 達祖, 하동의 翊謨 등 각지의 문중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34)

  이 실기에는 남평문씨의 世系, 문익점의 年譜, 문치창이 지은 家傳, 列朝褒典, 각祠院의 事蹟 및 諸公敍述 등이 수록되는 등, 체계적인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35)
1827년에도 경기도 安城에서 실기를 다시 발간하였지만, 고친 것은 없고 문중 내에 널리 배포하기 위해 편찬한 것 같다.
36)

  이후 철종 2년(1851)에 가서도 계항의 아들로서 문익점의 사손이 된 秉烈이 京中에서 실기 증보 간행을 주도하였다. 이 실기에는 海奎律髓集에 실려 있는 忠宣公詞律 三首와 여러 선현의 吟詠 및 輓章 등이 추가되있다. 이것은 계항이 후에 수습한 것으로 미처 실리지 못했던 것이있다. 37)

 

1870년에 와서도 남평문씨 문중에서는 단성현 신안의 문익점 묘각에서 문씨 대동보를 발간하는데, 이때 실기도 새로 중간하였고, 『道川院蹟』도 만들었다. 이때 간행된 실기도 1851년에 인쇄된 실기와 체제가 거의 동일하고, 일부만 약간 증보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남평문씨의 上系 부분에서 잘못된 부분을 수정한 것과 金自粹(1351-1413)의 『桑村集』에 실려 있던 시가 추가된 것이 그것이다. 38)
도천원적을 간행한 것은 『삼우당실기』에는 도천서원의 내력이 소략하기 때문에   내력에 관련된 글을 많이 실어 도천서원을 좀더 체계적으로 알리겠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삼우당실기』에 실려 있던 글중 상당 부분은 목차에 나열하면서 실기에 실려 있다고 註記만 하고 내용은 아예 싣지 않았다.
39) 
현재 각 가문과 각종 도서관에 광범하게 유포되어 있는 실기는 1900년에 다시 단성의 新安思齋에서 후손들이 단성사림과 협력하에 중간한 것이다.
40) 이것은 기존의 삼우당실기와 천원적에 실린 글을 모두 모으고 일부를 수정해서 아예 새로운 체계로 발간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편차와 규례에서 순서가 잘못된 것과 문자의 잘못된 것을 고치고, 연보에서 빠지고 소략한 부분을 추가하였다 가전에 수록되어 있던 庚午封事 元朝奏對 부분을 빼내어 별도로 싣고, 포은 정몽주와의 聯名疏, 목은 이색등과의 贈別詩 등을 첨부하였다. 그리고 당시 단성의 명망가였던 明湖 權雲煥(1853-1918) 厚山 李道復(1862-1938)등으로부터 검교받았고, 松沙 鄭時林 勿齋(老栢軒) 鄭載圭 定(1843-1911) 등에게서 서문이나 발문을 받았다. 41)

 

        2. 서원 건립, 청액운동과 문묘종사 운동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에서는 일찍부터 도천서원을 세우도록 명령했고 강성사에 대해서도 사액서원으로 승격시켜 주었는데, 이렇게 되면 서원의 지위가 그만큼 강화되고 관의 지원도 일정 정도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국가에서 이렇게 인정해 줄 수 있었던 것은 문익점이 남긴 공헌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후손과 지역 사림들의 문익점을 위한 끊임없는 현창 노력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를도천서원의 예를 통해서 보면 잘 알 수 있다.

  도천서원은 세조의 명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원래 사액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임란으로 중건한 이후 액자가 불타버리고 사사로운 액자를 걸어놓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우 중에서도 등급이 낮고 관의 지원도 별로 없는 지방의 鄕賢祠와마찬가지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42)
이를 타개하기 위해 숙종 34년(1708) 단성의 朴恒.泰를 비롯한 경상도 유생 300여명이 연명해서 사액을 요구하는 상소를 을렸다.
43)그러나 당시는 서원의 신설이나 사액의 금지조처를 강화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왕이 예조에 논의할 것을 명령했으나 담당 부서에서 동의를 하지 않아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44)

  그 뒤 정조 8년(1784)에 오면 전라도에 사는 자손들이 상언을 올려 장흥의 강성사에 대한 사액을 요구하였고, 이어 이듬해에는 전라도 유생 金相樞 등 600여명이 상소해 강성사가 사액되었다. 45)
강성사가 사액되자 곧 이어 정조 11년(1787) 도천서원 복액운동이 일어났다 李亨復을 비롯한 경기, 경상, 전라의 3도 유생 600여명이 상소해서 도천서원의 액자를 복구해 달라고 요구하였고, 결국 조정에서는 액자를내리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46)
서원을 창립한 이후에는 해당 선현에 대한 奉祀와 사림의 교육장소로서의 기능을 다하도록 여러 가지 규칙과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여 적절한 운영을 해 나가야 했다 이는 결국 자손과 인근 지역 사림에게 맡겨져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서원의 건물이 노후화되어 새로 짓거나 고쳐야 했다.
도천서원도 1461년 문익점이 공부하던 별채 三憂堂이 있던 도천 위에 세워진 이후
47)
여러 번 중건되고 이건된다. 그런데 서원의 위치가 좀 낮은 곳에 있어 수해를 당할 염려가 있다하여 명종 19년(1564)에 1리 정도 위쪽에 이건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소진되자 광해 4년(1612)에 다시 원래의 자리에 중건하였다. 그러다가 현종 13년(1672)에 현손 光瑞가 살던 유지로 다시 이건하였다.
48)

이후에도 중건한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은 1744,1770, 1797, 1805, 1865년으로 이런 중건과 이건과정에서는 자손과 인근 사림이 적극적으로 간여하고 있었다. 49)

  그런데 문익점을 모신 서원은 도천서원, 강성사 외에 여러 곳이 있었다. 황해도 松禾縣의 三峰書院, 전라도 昌平縣의 雲山書院, 경상도 義城縣의 봉강書院이 그것이다. 이중에는 문익점의 자손이 많이 모여 살고 있으면서 그곳에 거주했던 다른 조상과 함께 문익점을 모시는 경우가 많았다.

  건립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창평현 사림들이 문익점의 손자인 越川君 文彬(?~1413)이 유배되었던 곳이라 하여 雲山書院을 세웠는데, 1859년 이곳에 문익점과 손자 장연백 文萊를 추가로 제향하였다. 50) 문빈은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협력한 공으로 월천군에 봉해졌던 인물이었다. 51)
담양, 창평에는 문빈의 자손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文致龍(1746-1814, 호 雲齋)과 文天壽(1736-1810, 호 梅堂) 등이 서원 건립을 주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52)  1864년에는 의성 사림들이 문익점 손자 承魯가 수령으로 와 있으면서 晩川洞에사묘를 세웠던 것을 기려 그곳에 鳳崗書院을 건립하였다. 53) 이곳은 문익점이 이 고을에 처음 목면을 확산시킨 곳으로 알려져 있고 손자인 승로가 의령현감으로 와서 기념지로 가꾸어 놓은 곳인데, 문씨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54) 
실기에는 이보다 시기가 훨씬 앞서서 인조 22년(1644)에도 황해도 유생들이 송화현 桃源 三峰山 밑에 삼봉서원을 건립하였다고 하였는데
55) 실기의 연보에는 문익점이 송화현에 은거했던 사실이 나타나지 않고 이곳에 그의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정황도 알 수 없다. 좀더 다른 문헌을 통해 분석해 볼 여지가 남는다
자손과 사림들이 문익점을 현창하기 위한 운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8세기말경부터는 문익점을 문묘에 종사하기 위한 운동도 전개해 나갔다. 정조 16년(1792)에는 생원 李福를 소수로 하는 다수의 유생들이 문익점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려고 하였다. 상소문을 지은 魏伯珪(1727-1798, 호 存齋 또는 桂巷, 전라도 장흥 출신)가 문익점을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며 내세운 논리를 들어보면다음과 같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데 문익점이 처음으로 목면을 전파함에 가죽옷과 갈포옷을 입었던 풍속이 크게 변해서 우리의 관대의 풍속이 이루어졌고 백성들이 추위에 떠는 것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공을 논한다면 마땅히 주나라의 후직과 더불어 사당에 모셔져야 하고 팔도의 백성들이 가가호호에서 제사 지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제사 지내는 곳은 다만 단성의 도천서원과 장흥의 강성사 두곳뿐이니 삼백 고을의 인심이 그 누가 문묘에 제향되는 반열에 이르도록 노력해서 경모하는 정성을 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56)

그들은 상소문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으나 국가의 금지정책으로 인해 결국 왕에게 진달하지 못하였다. 57) 그 이후 한동안 문묘종사운동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다자 시기가 분명치 않지만, 1870년을 전후해서 다시 청무운동이 시작된다. 즉 鄭在慶, 朴尙台(1838-1900, 호 鶴山)를 비롯한 사림들이 상소를 올려 문익점의 문묘 배향을 요구했으나 이를 불허하는 왕의 비답이 내려졌다.58)
그 뒤에도 洪在誠과 朴齋晩 등을 중심으로 한 3차 상소와 金健秀와 沈宜肅 등의 4차 상소가 이어졌지만, 번거룹게 하지말라는 비답이 내려졌을 뿐이었고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59)


              3. 부조묘 복구 운동

문익점의 부조묘가 설치되어 있는 단성에는 그의 손자, 증손대에는 자손들이 별로 살고 있지 않았고 단성 이외의 다른 곳으로 흩어져 살고 있었다. 당시에는 男歸女家 현상 등으로 인해 인구 이동이 활발하여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벼슬살이로 인해 서울 근처에 거주하는 현상도 많았다.
문익점의 자손도 마찬가지였고, 봉사손인 종손 이외에는 자유로운 상태였다.
그런데 문익점의 자손이 단성에 많이 살지 않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文可學 사건으로 인한 단성 이탈현상이 그것이다. 문가학은 문익점의 동생 益夏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태종때에 반란을 주도한 혐의로 처형당하였는데, 그 내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종 2년(1402) 진주 출신인 예문관 직제학 鄭以吾가 진주에 사는 문가학이 비를내리게 하는 비법을 알고 있다고 하여 왕에게 추천하였다. 태종이 그를 불러들여 시험하였는데 그가 치제를 하자 과연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는 항상 神衆經을 외워 도를 얻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다른 사람들을 현혹했다고 한다.
60)

그 이후에도 테종은 그를 곁에 두어 여러 번 비를 내리게 했으나,61) 후에 효험이별로 없자 내쳐서 開城留後司로 가게 하였다. 그는 이후 이곳에서 생원 金천, 주부任聘, 생원 趙方輝, 부정 曺漢生, 소윤 金亮 등 여러 사람과 공모하여 모반을 하다가 발각되어 잡혀와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太宗實錄』에 나와 있는 내용을보면 다음과 같다

妖淡人 문가학과 그 무리를 체포하여 순금사 옥에 가두었다. 참찬의정부사 崔有慶에게명해 委官을 삼고, 겸 판의용순금사사 李叔蕃 ?尹祗, 형조 판서 金希善, 사헌 집의 崔府 등과 더불어 국문하게 하였다.
가학은 진주 사람으로 太一算法을 대충 익혀 스스로말하기를, '비가 내리고 별이 날 낌새를 미리 안다'고 하여, 나라 사람들이 점점 이를 믿는 자가 있게 되었다. 임금이 불러 시험하고자 하여 書雲觀의 벼슬에 임명했는데, 오랜 날이 지났어도 효험이 없어 그를 내쫓았다. 그가 開城留後司에 있으면서 어리석은백성들을 거짓으로 달래며, 은밀히 생원 金천에게 말하기를, '이제 佛法은 쇠잔하고 流文이 여러 번 변하였소.
내가 神衆經을 읽어 신이 들면, 귀신을 부릴 수 있고, 天兵과 神兵도 부르기 어렵지 아니하오. 만일 人兵을 얻는다면 큰일을 일으킬 수도 있소' 라고하니, 김천이 그릴듯하게 여기고 곧 전 봉상시 주부 任聘 ? 생원 趙方輝 ? 전 부정 趙漢生 ? 전 소윤 金亮 등과 더불어 모두 그에게 붙어, 마침내 난을 꾸미었다. 임빙의 외조부 부 사직 趙昆이 그 음모를 알고 고하여, 문가학과 그 무리들을 체포해서 국문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 문가학을 미친 놈이라 여긴다. 천병과 신병을 제가 부를 수가 있다 하니, 미친 놈의 말이 아니겠는가?' 라 하니, 黃喜가 아뢰기를, '한놈의 문가학은 미친 놈이라 하겠으나, 그를 따른 자들이야 어찌 다 그렇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임금이 국옥관에게 발해. '지금 문가학 때문에 죄가 없는데 갇힌 자도 많을 것이니, 빨리 분변함이 옳겠다' 라고 하였다.
62)

이 사건은 중대한 모반사건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연루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많은 사람들이 잡혀갔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 63) 결국 문가학과 일부 핵심 연루자가 처형당하고, 문가학의 어린 자식도 교살되었다. 64)

 이 사건으로 인해 관련자의 친족들이 연좌되어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 한해를 당하거나 일이 있을 때 연좌된 사람들을 풀어주는 조치를 취하지만 왕자의 난에 연루되었던 朴苞와 문가학 등의 친족들은 제외되었다. 65) 

원래 모반죄를 저지르면 당사자의 조부에서 손자까지와 형제는 죽임을 당하거나 노비로 되고 재산은 적몰되었다.
그리고 방계로 조카 및 백숙부 등도 연좌되어 먼곳에 유배되었다.
66) 문익점의 자손들은 이 연좌제의 직접적인 범주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 여파가 그들에게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문익점 자손중에도 그 영향을 받아 단성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남평문씨대동보』에는 문익점의 손자 文承孫이 '從叔(문가학)의 처형으로 화가 종족에 미쳐 여기저기 도망쳐 숨어 살게 되었는데 공은 溟洲로 들어오셨다'고 기록되어 있다.이는 좀 과장되어 있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 정황은 17세기 중반 李時○에 의해서 편찬된 『雲窓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운창지』에는 문가학과 관련된 전설이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앞에 언급된 태종실록의 기사와는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문가학이 젊었을 적에 淨趣庵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여우가 미녀로 둔갑하여 사람을 흘리고 있어 이를 잡아 죽이려 하자 여우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둔갑술이 적힌 비결을 제공하였다. 그는 이를 이용하여 궁궐 내에 들어갔다가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문가학은 죽임을 당하고 단성현에는 그 자손들이 살 수 없도록 모두 바닷가 변두리로 유배시켰다. 지금 東萊府에 거주하는 문씨들이 그들이다.
67) 
이런 상황에서도 문익점의 4대 장손인 光瑞는 큰 피해를 받지 않고 단성에서 살고 있었다. 문익점의 공훈에 대한 국가의 은전이 상당하고 그에 대한 부조묘나 묘사에 대한 봉사를 맡아야 하는 장손이므로 국가에서도 제재를 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광서에게는 서자 彦國 이외에는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매부 박천군수李鶴(여주이씨)의 아들 李承宗을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여주이씨는 단성에서 세거하지 않고 서울 인근으로 이거해 버렸다.
68)

 서자인 언국도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문중 내에서는 광서의 조부 善仝의 동생인 義仝의 증손 世華를 사손으로 삼았다가 다시 문익점의 제2자 中誠의 5대손인 善昌을 사손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들은 단성에 거주하지 않고 경기도 楊州 또는 長湍에 거주하였고 선창의 증손인 彦祥 때에 가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다시 사손이 끊겼다. 69)
그 이후 오랫동안 사손이 끊겨 있다가 19세기에 가서야 중성의 지파 자손중에 桂恒의 아들 秉烈이 부조묘의 제향을 책임지는 사손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이런 조치는 이때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자손들이 여러 차례 사림을 움직여 부조묘 복구를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1730년경에 자손들이 상언을 올려 부조묘의 복구를 요구했지만 상신들이 그대로 덮어두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했고 정조대에 와서 장령 李燮이 또 다시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70)
그 뒤 정조 20년(1796)에 다시 장령 朱重翁이 상소를 을려 부조묘 문제를 제 기 하였다.
71)

이때에도 국가의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것 같다. 그 이후에도 자손들의 부조묘 복구운동은 계속되었을 것이지만,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다가 헌종 7년(1841) 문중 내에서 병렬을 사손으로 인정하는 회의를 거쳐 완문을 작성하였다. 여기에는 호남, 영남, 호서 등 각 지역에 를어져 살고 있던 삼우당 자손의 대표들이참여한 것 같다. 72) 그리고 1844년에는 관의 허락을 받으려고 문중의 여러 사람들이 연명해서 예조에 상서를 올렀다 부조묘의 사손으로 병렬을 세우고자 했으나 감히사사로이할 수 없어 허락을 얻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73)
1854년에는 충청, 전라, 경상도의 유생들이 나서서 왕에게 상소를 올려 국가로부터 다시 부조묘의 계승봉사를 인정받게 된 것 같다.
74)

  그런데 이 당시까지는 부조묘가 단성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사손이 있는 전라도 보성으로 옮겨야 했다. 국가가 인정하는 부조묘를 옮기는 데는 관의 여러 가지 도움이 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관찰사에게 상서를 올려 경유하는 고을의 관아로 하여금 옮기는 과정에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요청하기도 하였다. 75)


           4, 단성 사림의 적극적 참여

지금까지 언급해 왔듯이 문익점에 대한 현창운동에는 자손뿐만 아니라 전국의 사림들이 참여해 왔다.
그중에서도 단성현의 사림의 참여는 가장 적극적이었다. 문익점이 단성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단성현은 원래 작은 고을로서 고려 말까지만 해도강성현과 단계현으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강성현은 진주에, 단계현은 합천에 속해있었다. 그러다가 공양왕 때에 수령이 파견되면서 두 고을이 합쳐져 단성현이 되었. 것이다. 76)

그러나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단성은 전국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단성 출신의 인물은 진주 출신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고려 말 조준이 문익점을 탄핵하는 내용에서도 문익점을 진주출신으로 보고 있고, 문가학이 천거될 때도 진주 출신으로 서술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77)
이런 고을이었기 때문에 문익점과 같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유명 인물을 배출한다는 것은 이 고을 사림으로서는 대단히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문가학 사건 이후 단성에는 문익점의 자손들이 거의 살고 있지 않았다. 사손으로서 단성을 지키고 있던 문광서가 여주이씨를 양자로 들인 것이라든지, 조선중기 문익점의 증손녀로서 합천이씨 季通과 결흔한 문씨가 묘사 중건에 앞장셨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단성에서의 문익점과 관련된 서원, 묘사 등의 관리 및 문익점에 대한 현창 작업은 합천이씨 등 외손들과 단성의 사림 손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배양마을에 정착한 합천이씨가 외손으로서 문익점을 현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하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淸香堂 李源의 역할은 『운창지』에 도 잘 나타나 있다. 78)
그는 효자비각을 건립하는 것과 이를 기념하는 기문을 당시 명사에게오청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79)

  딘성의 다른 가문의 사림도 고향 출신인 문익점에 대한 애착과 긍지를 느끼고 도천서원의 운영과 중건뿐만 아니라 청액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단성에서는 사액서원으로서 내세울 만한 서원은 도천서원 밖에 없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도천서원도 1461년 도천 위에 세워진 이후 여러 번 중건되 고 이건되었다. 서원의 위치가 충 낮은 곳에 있어 수해를 당할 염려가 있다하여 1564년에 1리 정도 위쪽에 이건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소진되자 1612년에 다시 원래의 자리에 중건하였다가 1672년에 현손 光瑞가 살던 유지로 다시 이건하였다. 그때마다 단성 사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증건하고 관아에 지원을 요청할 때도 적극적이었다. 80) 이후에도 1744, 1770,1797, 1805, 1865년에 중건되었는데

합천이, 성주이, 안동권, 진주유씨 등 단성의 유력 가문의 인사들이 중건의 실질적인 직임을 맡는 등, 적극적으로 간여하고 있었다. 81)

 이중 1865년에 도천서원의 원임으로서 서원 중건을 주도했던 李邦儉의 道端述言에는 당시 서원중수과정에서 단성 사림들이 활동했던 여러 모습들이 그려지고 있다 즉 1864년 7월에 도천서원에 비가 새어 여러 가지 집물이 젖고 일부 서까래가 기울고 창과 벽이 일부 무너질 것 같은 지경에 이르자, 이방검은 단성 사림 각 가문에 통지하여 다른 서원의 향사 모임 때 논의하고 전달하여 서원 중수 방향을 정할 것을 촉구하였다. 82)

  이런 과정을 거쳐 1865년에는 講堂과 酒庫를 중수하였고 그후 西齋, 典廳, 庫舍등도 새로 세우고 사당의 수리도 시급해서 위패를 강당에 임시로 봉안하는 문제 등이 발생하여 다시 단성 사림의 각 가문 대표들에게 회의소집을 알리고 있다. 83) 이에 드는 비용 부족 때문에 인근 고을에 통문을 돌려 각 고을 사림들의 도움도 요청하였고84) 각 고을에 사는 문익점 자손에게도 자금 모금을 요청했다. 85) 그러나 일부고을의 문씨들이 협조하지 않거나 자금모금을 맡은 일부 인사가 자금을 보내지 않은 등 문제가 생기자,86) 진주, 하동, 곤양 사림들과 연대해서 이에 대한 징계를 관에 요구하기도 하였다. 87)

 

단성 사림들은 문익점의 위패 환봉시에는 관의 경제적 지원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88)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708년 박항태 등 단성 사림이 도천서원 청액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지만, 사액서원이 된 후에는 權思國 등 단성 사림들이 도천서원에 대한 면세운동도 전개하여 관의 지원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89)  이외에도 문익점을 현창하기 위한 방법으로 1708년과 1766년에는 단성 사림들이 行蹟記를 만들기도 하였고 자손들과 함께 실기와 도천원적 편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90) 물론 도천서원이 사액된 후 배향되어 있던 東溪 權濤의 위패 처리로 단성 사림들이 반발하는 등 한때 미묘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단성 사림들은 대체적으로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91)

  문익점을 문묘에 배향하기 위한 운동에도 단성 사림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19세기 중반 청무 상소문을 朴尙台가 지었다든지, 이 당시에 이방검 등이 도천서원을 증심으로 각 사림들의 의견을 결집하는 활동을 했던 것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92)


               맺 음 말

이상의 논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문익점이 남긴 행적에 대해 후대의 유명 인사들의 칭송은 줄을 이었다
이황은 문 익점이 목면전래를 통해 일국의 衣冠文物을 새롭게 일신시켰다고 하고 효행과 절의 를 통해 그가 후세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극찬하였다.
송시열도 문익점의 목면 전 래의 사실을 들어 그는 동방의 후직과 같다고 평가하였고, 안유와 문익점 두 분이아니었으면 우리 동방은 오랑캐 문화에 빠지는 것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극찬 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인물이 문익점을 칭송하는 글을 남겼다.  그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이 켰기 때문에 국가의 포전은 성대했다. 우왕 9년에 조정에서는 문익점이 살던 마을인 배양리에 효자비를 세우게 하였고, 후에는 비각도 세워졌다. 정종 2년 문익점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祭圖을 내리고 墓祠를 건립하게 함과 동시에 守塚과 復戶를 내려주었다. 그가 조선왕조에 와서 관직을 지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태종 원년에는 藝文館 提學을 증직하고 江城君으로 봉하였으며 시호를 忠宣이라 하였으며. 그에 대한 不조廟도 세우게 하였다.
세종 22년(1440)에는 영의정을 추가해 증직하고 富民侯 봉하였으며, 세조 7년에는 고향인 단성에 사우도 건립된다. 그리고 후대에 가떤 이 도천서원과 함께 전라도 장흥에세위진 강성사에 사액이 내려진다.

이처럼 극가의 은전과 후대의 유명 인물의 평가가 많이 나을 수 있있던 것은 문익점이 끼친 공헌과 행적으로 보아 당연하였지만, 그의 자손들과 단성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바림들이 그를 현창하기 위해 노력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  자손과 사럼들은 문익점이 어떤 인물인가를 알리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실기를 간행하고 증보하었다. 그리하여 잘못 알려진 부분을 고치고, 소략한 부분은 보충하였다. 그가 제향된 도천서원을 알리기 위해 『도천원적』도 편찬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도천서원을 중건해서 운영하고 사액을 받아내기 위한 운동도 여러 차례 전개하였다 단성의 도천서원 및 장흥의 강성사 이외에 황해도 송화현의 삼봉서원, 전라도 창평현의 운산서원, 경상도 의성현의 봉강서원에도 제향되었다.
자손과 사림들은 더 나아가 문익점을 문묘에 배향하기 위한 운동도 전개하였다 문가학 사건 등으로 자손들의 단성 이탈현상이 나타나고 부조묘 제향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자 이를 복구하기 위한 노력도 진행되있다.  이런 현창운동에는 어느 지역 사림보다도 단성 사림의 열정이 켰다 문익점이 단성 출신이어서 더욱 더 애착과 긍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천서원 건립, 증건, 운영뿐만 아니라 사액운동, 문묘종사운동 등 여러 운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실기의 편찬과 『도천원적』 편찬에도 그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같이 논지를 정리하여 보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실기나 기타 자료가 지니고 있는 한계에 대해 명확하게 지적하지 못하고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이 그 하나이다 이 부분은 좀더 시간을 두고 치밀한 분석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단성뿐만 아니라 문씨들이 사는 다른 지역의 자료들도 체계적으로 발굴하여 좀더 종합적인 관점에서 논지를 전개해 나갈 필요성도 느꼈다. 자료가 많이 발굴된다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들이 새롭게 드러날 것이다  

 1

 그동안 문익점과 관련하여 연구한 글들을 보면  김성준의 글이 있고 나머지는 소개하는 글이다
김성준, 문익점과 목면전래이 역사적 배경 동방학지(연대 국학연구원 77.78,79합집 1993
김희덕 문익점 목면문화의 문명의 동점 역대인물한국사3 신화출판사 1979
이이화, 「문익점: 의류혁명을 일으킨 풍운아」 『이야기인물한국사』 1, 1993.
장도빈, 『한국의 혼』 경학사, 1998.    李장희, 『讀史餘錄』 경인문화사, 2001.
이은직저 정흥준 역 한국사명인전 1, 일빛 1997

2

강성군 사실록은 필사본으로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고 도천원적은 도천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3

이황 퇴계집 권 42 기 전조고좌사의대부문공효자비각기

4

高露定節要』 권34, 공양왕 원년: 諦官李竣等 以私田不可復 上書爭之 左司議文益漸 附牆琳玄寶 移病不書名 翌日徑赴書筵 趙浚劾日 益漸本以遺逸 努耕晋○ 以賢良拜諫大夫 置之左右 以資淸問 誠宜   進盡忠言 敷陳治道 以補聖治 而依違苟容 無諫爭之節 ○○束手 唯唯諾諾 頃者 同舍郎吳思忠李舒 各自上疎 極言時事 益漸持祿患失 無一語及之 又同舍郎 聯名上疏 極論田制 益漸依○權勢 稱病不與 自以爲得計 上累識下知人之明 下負士林期待之望 是宜削其官爵 放歸山下 以爲有言責 而不言者之戒也   卽罷益漸.

5

宋子大全』 績拾遺 권1 跋 書 三憂堂文公遺事後: 忠宣公 亦吾東方一后稷也---安文成公裕 文忠宣公   亦龍相承 吾道燦然復明 夫德深 則人莫能識 擊壞之語日 帝力何有 天功莫○ 地德難測 程朱旣沒 惟我   東方安文二賢 能得其傳 ○安文二賢 吾東方 ○未免涉於○虜之行矣

6

삼우당실기(1900) 권2 諸賢詩章 참조

7

도천원지 권1 行蹟記 말미에 旅碑의 내용이 실려 있는데, 안렴사 여극인과 고성군사 崔복린이 이를 세우는데 간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8

삼우당실기(1900) 권2 孝予碑閣重修記(權潗, 天啓癸亥(1623)): 洪武癸亥 命立閣 而嘉靖癸亥重立庇之 退溪李先生 記其事

 9

李混, 『退溪集』 권42 記 前朝故右司議大夫文公孝子碑閣記: 江城縣之南 培養山里者 前朝故司議大夫   文公之舊居也 里之中有孝子碑 洪武十六年癸亥 朝命旌公之孝行者也---獨碑之立 如彼其久也 無所庇陰 今懸監安侯○行春而適見之 旣下馬  致敬而詢得其詳 慨然日 先賢之懿行如彼 先王之激賞又如此 而   碑顧露處 ○乃守土者之責也 ○命工楊鳩 相度立一閣以覆之---前後具事跡 而請識與記者 源也 而前之   識墓祠者 爲方丈山人曹植也 後之紀碑閣者 退溪老人李滉也 記閣之歲 則가정四二年之癸亥 後於立   碑之癸亥一百八十有一年也

 10

 삼우당실기(1900) 권5 年譜: 明宗18年 重建孝子碑閣(縣졸○안전 鳩財重健 文純公李滉記之 萬曆丁酉 碑閣毁于倭○張 天啓癸亥(1623) 縣○李元吉重健 博士權潗記之)

 11

 삼우당실기(1900) 家傳(증손 司憲府監察 致昌, 天順 8년(1464)): 庚辰(1400)二月八日 終于第---賜  祭田健墓祠 置守塚四人 給復二給

 12

 삼우당실기(1900) 권6 年譜: 明宗16年 重建墓祠(時宗孫光瑞無后 諸孫散居他鄕 先生曾孫女令人文氏  時居本鄕 狀訴于道伯 鳩財重健 文正公曺植記之 壬戌(1562)令人孫淸香堂李源 以令人狀議于鄕老  增難祠舍及祭田 懸○成遵 又以公田益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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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당실기(1900) 家傳(文致昌): 辛巳(1401)冬太宗大王 贈嘉靖大夫參知議政府事知經筵事兼藝文館  提學弘文館春秋館事 賜竭忠補國啓運純誠佐翊澤重廣利貞貞○功臣匿 封江城君 휘忠宣 立不부조廟 賜祭田 100결 노비70인 旌其門給復戶 有子孫錄用優恤 萬世不革之典事 庚申(1却0)世宗大王特命 加秩大광보국숭록대부議政府領議政 封富民候 ○于元功 命政承南智 接察嶺南 賜祭墓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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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당실기』(1900) 권3의 역대왕의 賜祭文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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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憂堂實記』(1900) 권3 列聖朝傳敎에 의하면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경종, 영조, 정조에 걸쳐 십여 차례 전교가 내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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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憂堂實記』(1900) 권6 年譜: 世祖 7年 命違祠享之 賜額道川祠 遣禮官致祭 先時丙子 直提學梁誠之 상소請建祠 上徒之 命結財健祠 於是嶺南儒生 ○健于道川之上 卽先生別○講道之址也 祠成賜額致  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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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실록 권20, 9년 9월 辛亥: 禮曺以全羅道儒生金相樞等上言啓言 益漸奉使入元 以恭懲昏暴 將  欲廢立 則爭不奉紹 遂○劒南 三載始還 中朝潛取木綿 敎人織造 其利於民如此 恭靖大玉 念其衣民大功 追退封延城君 太宗朝命立書院 世祖朝追封富民候 贈謙忠宣 增置祠田脚. 이 당시의 자손, 사림들의 생각이 그러했기 매문에 이들이 작성한 행적기나 공행록에도 잘못되어 있는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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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실록 권19, 10년 4월 甲辰: 사간원條陳時務八事 議政府○議以聞---其六日 人之所賴以生者 衣食而已 吾東方 始知桑麻 而不知木綿之爲何物也 간의대부文益漸 奉使中原 得種而還 以惠吾民 上自卿士 下至庶人. 上衣下裳 皆以此爲之 其有功於民 可謂犬矣 故國家已擧褒賞之與 追崇爵秩 可謂稱○  然○之於古 凡有功於--道者 皆設祠堂 而祀之 況有功於一國者予乎 顯構祠堂於貫鄕 給祭而祀之  以示盛朝崇德報功之意 議得 己曾褒衰賞 其構祠堂給祭田 姑且停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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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실록 권3, 2년 3월 T酉.梁誠之, 「訥齋集』 권2 奏議 便宜二十四事
一. 文崔立祠 ○臣聞聖人之制祭禮也 法施於民 則祀之 能禦大患 則祀之 吾東方舊無木綿種 前朝文益漸 奉使留元 始得而種之 遂流遍一國 至今無貴賤男女 皆衣綿布 又自新羅只有砲石之制 而歷代無火藥之法 前朝未崔茂宣 始學火砲之法於元 東還而傳其術  至今軍陳之用 利不可言 茂宣之功 萬世除民害也 益漸之功 萬世興民利也 其澤被生民 豈曰小哉 乞信於二人鄕貫 官立祠宇 春秋令本官行祭 其子孫稱爲功臣 ○罪錄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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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당실기 (1900) 권6 年譜: 中宗6年 碧溪影堂成---明宗22年 賜額碧溪影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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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平文成大同譜』에 의하면 文熙預은 善昌의 사촌 孝昌의 제2자이고, 文允明은 가전을 쓴 문치창  의 손자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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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우당실기(1900) 권4 丹城健院記(朴思徵): 立院年紀 基址世代○遠 屢經兵○ 未克詳知 然古老流傳   正德年間 本脚有碧溪書院云 而無籍難○(此本影堂 恐後爲書院) 就○先生後孫文熙碩所錄 先生書院   在咸陽碧溪 又考文允明上言中 先生行狀在咸陽碧溪書院 其說果○流傳 然今○咸陽山水 無碧溪爲號 但其郡治差殊無乃 本縣古兪屬咸陽而然耶 本縣有碧溪山 且本縣古今以來 無表著名賢 而獨有先生 則古   必有祠 先生書院似在本縣碧溪 而旣無詳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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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窓誌 「都山4八坊考證 3 耳谷; 可學在幼學時 自課爲學 其讀書堂基址 在於碧溪溪上之山腰 時或  讀書於淨趣之庵.(『운창집』 권2 丹城誌에는 독서당이 벽계에 있었다는 언급이 삭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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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緯世, 『풍암實記』 강성사圖記: 長興府北 有楓庵書院 풍암文公휘緯世 爲退溪先生高弟---崇禎甲申(1644) -道章甫之慕仰 久而愈切 乃○院字於月川之上---至英廟壬子 章甫輩以爲公(문익점)難己設祠   其忠孝犬節 種綿奇勳 難家祀戶享 難酬其功德 遂復合享於楓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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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래, 풍암 문위세의 생애와 의병활동」풍암 문위세 學術調査(全索文化財硏究院) 2002, 8-27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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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道川院蹟』 권1 年譜: 壬子(1732) 追享于長興月川祠(卽先生九世孫풍암緯世所享之院也 湖南儒生 因  館學通章 以先生追享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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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川院蹟』 권1 年譜: 乙巳(1785) 賜額江城祠 遣禮官致祭(卽月川祠也 因湖南儒生上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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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1870년의 삼우당실기에는 '事責本記'였으나, 1900년의 삼우당실기에는 '家傳이라 수정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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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당실기(1900)권6 年譜: 世祖8년 家傳成(曾孫감찰공 致昌撰 中間見○ 純祖戊辰 文氏修譜時 得於   後孫之左在海島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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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川院蹟』 권1 행적기序(朴思徵): 前古行蹟有無 今未聞知 雨越在戊子(1708)歲 鄕父老略記名賢所錄   23條 以成卷帙矣 甲申(1764)秋 因奠廳火變 盡入灰○ 不○適以雷添院任 慨然于先生行蹟泯而不傳  旁求可○ 則前朝事 其證詳錄也 與同任都命○朴思權 ○求左右 國朝列聖褒贈 以國乘所載緣之 戒謄麗 史所載 或輯先師所記 及文氏譜書勝覽所載中 採而集之 忘其孤陋 以成卷機 幸或免識者之說耶 謹以序   次如右 名日 忠宣公行蹟記.(崇福三丙戌刊 揭于道川書院講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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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는 『江城君事實錄』이라고 되어 있지만, 말미 발문에는 '忠宣公功行錄跋'이라 해서 충선공공   행록이란 명칭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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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憂堂寶記』(1500) 舊跋(文桂恒): 去丙戌 丹城士林朴思徵 纂行蹟記一卷 因道川院蹟而爲之者也 又戊申 冠山宗丈泳光氏 刊功行錄 行于世 輯諸家所藏雨成之者也
然皆是○襲巾衍文字耳 其間大義所○궐  頗多錯亂 且年月時代 互相○○차 以起後惑者甚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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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憂堂實記(1900) 권6 년보 세조8년 가전만듬(증손 감찰공치창찬 중간견○ 순조무진 문씨수보시 得於後孫之在海島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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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憂堂實記(1900) 舊跋(文桂恒): 三憂堂先生---旣歿之四百餘年 世代綿遠 宗嗣屢乏 先生所著詩文

及疏章 不爲不多 初火宇家 再○于兵 蕩然無傳 而中問收錄 只有家傳一本 ○天順甲申 감찰공 치창所  撰 而亦且遣逸 伊所傳 特各家所若干私乘而已---去戊辰夏 幸因譜書之刊役 得所謂家傳一卷 卽天順八年之遺輯者也 桂恒卽관手開卷 瞭焉如○心目 自是不覺愚陋 濫生潛意 留心於革謬歸之城 冬長興宗老就光氏 枉駕立雪 而於亦先獲志者也 於是○探諸名勝述作 ○諸賢遺集 雖片言雙字 有足以徵信者 則幷力鳩集 大小經紀于有年於此歲丁丑秋 期會于京中 廣搜公私書籍 反覆折哀 正其差謬 ○成一部  屢謁於光山金丈允秋庭堅 南陽洪永燮 海州吳羽常 驪興鬪泰鏞諸君子 得以訖 校正編次之工 次謁證當  世之達尊好古大人 敬受○首之文 而附之○○氏 越明年戊寅孟冬 始印于嶺之河上 己卯之春工訖 ○是役也 永光氏幹其事 安城鍾九 長興達祖 河東翊謨諸宗 贊其功 至於衰輯正誤之工 桂恒亦不政辭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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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당실기』(1900) 舊序(洪義浩, 1818): 今先生之○孫就光桂恒 哀輯世系年譜家傳本記 列朝褒典 祠  院事蹟 及諸公敍述 博○旁搜 ○次成編 合爲一部實記 將付○○氏 壽其傳 而來徵義浩 以○卷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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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당실기(1900)舊跋(文秉烈): 此實記 我先考去戊寅 始印于嶺之河東 且丁亥重刊於畿之安城一  依舊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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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당실기(1900)舊跋(文秉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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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우당실기(1900)舊跋(文秉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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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천원적 서발(경오(1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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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당실기(1900) 권5 遵川書院請復額疏(소수 李亨復): 曾於龍蛇兵翼之後 廟宇毁破 恩額旅濕 萬   潛了-于 道內多士重潛舍字于舊祉 難鉛舊號灌道川 而딨難 私揭舊額 便同據祠 見漏官享 此乃兵革之餘   닐未造之致也---而士氣未振 復額之擧 遠今遷就 古之國賢 今同揮賢 昔之官享 今爲私享 章甫缺歎   닌 不瞭言 雨獨不爲盛世之次典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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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院蹟』 권2 道川書院請額疏(載春曺文案 肅宗戊子(1708)春) 慶尙適儒生朴恒泰等百餘人노疏.꾸'1 ?근麥堂寶記』(1900) 권5 道川書院請復額疏(소수 李亨復): 業於肅廟朝戊子 嶺南儒生朴恒泰 流誇額   래밖틀EB 士氣不振 至于今 辯未延額 孤負聖朝之厚典 不勝暖惜之至 船令禮曺裏處 而該충端循尙未擧行.45) F,3)1:院蹟』 권2 責城祠請額고言(쵸宗乙已(1785)): 全羅道儒生金相權等六百餘人 右謹啓.   '臺堂寶쳔』(1900) 권5 狂城치請額疏(소수 金桐權)' 二字恩額 尙未宣下 在朝家崇報之典 雖是未造  之擧 在온林想望之地 自切仰蠻之沈 玆將公議聯名 仰鑛於法鷺之前--- 批日 下該曺素處事 禮曺刻書   金履素潤懲炯---事當依所請施行--- 批日 特爲許施 遣曺致祭(1--月-聞禮 成禮曺鄧繼친).45) 1'述川院蹟』 권2 道川書院請復額上言(追宗T未)): 京畿慶尙全羅三道儒生幼學臣李亨復等六百餘人.    F憂堂寶記』건900) 권5 道川書院請復額疏(소수 李亨復)도 참조.

 

47i -遷堂實記』 권6 年譜에는 福王 9년(1383) 가을에 '三憂堂成(堂在脚東集賢山下悟理洞道川之上 先  生嘗愛其川漏野峻 至是構芽數緣 乃焉其循日三憂)'라고 되어 있다.

,精) F프憂堂寶記』(1900) 권6 年譜: 世祖7年 命違祠享之 賂額遵川祠 遣禮官致祭---於是嶺甫儒生 辯遷子  通川之 1?. 卽先生別聖講道之逃也 祠成賜額致祭. 광해 4년(1612) 重違道川祠(先時裏埼甲子(1564) 羚城   1:林 以院基卑下有水患 移違于差上一里之地 萬曆臺辰 院字燈于兵製 其後二十~-年壬子春 生員李穀  率辯人 狂諦伯而韓閣 重遼祠於道川之別聖 顯宗壬子 移違于先生業孫光瑞所潛之地).49) F프憂量責記』(1900) 권4 道川書院』ㅁi宇臺修記(李鳳興(1735-1810), 崇福三T巳(1797)): 榮任司方臺修   役 余잘慰其勞 禽던 此院卽吾鄕先父老出入之所 子之堂叔公 甲子(1744)重修 子亦修于庚寅(1770) 其   後小小之修 非止一崙 而俱無記蹟 恐欠狀寶 船今之役 而子童』識之.   『三憂堂責記r(1900) 권4 適川書院重修記(柳泣龍(1753-1821), 崇福三乙丑(1805)): 院在賢山西道水   --- 今道川 卽儒狀達以宗孫遣찬침 辯구天順辛巳(1461) 移于壽請甲子 毁于萬曆壬辰 越庚申(1620)重   建--- 及今年 先生後孫 同辭合財 旣修墓及閭 又日 先祠不理 子孫之遇 遂委之工 船壞革宇飜眞覆 權   適李漢童戒 朴啓 근權一錄潤色之.

   「道川院蹟』 권2 道川書院重修퍽(李邦儉, 乙丑(1865)): 吾鄕先父老 昔倣祭찬之義 始創廟宇 遷臺而턴   視之 旣疏擧蒙額也 更惰廟貌 以需萎培之慕 星霜造蠻 風雨磨淋 瓦類核朽 傾頭之歎 已有年所 鄕議未   造 徒抱證惟客獲之心矣 適於甲子秋 因其享禮 會議修資---辯定修繕之役.30) 『道川院蹟』 권1 年譜: 크未(1歸9) 洋享于昌平雲山書院(士林因館學通章 以先生孫越川君浴諦居之脚   建祠 持辛先生及先孫長端伯菜焉).

핀) 『太宗實錄』 권26, 13년 7월 14일(辛卯)조에는 그가 죽자 태종은 3일간 정사를 폐함과 동시에 致祭   하게 하고 平翼이라는 시흐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if) '남평문씨대동보』에 의하면 文天壽는 '與從伯雲齋公 共扶宗事 辯立雲LIJ書院 前肩周幹'라고 기록되   있고, 文致龍은 '追先效力 辯立雲山書院'고 되어 있다.

33) "근憂堂賞記』(19脚) 권6 年譜: 今上元年 遂鳳纖書院(院在義城脚 先生長孫承魯 嘗守是邦 立祠廟於   驛齋晩川洞 今上甲子 士林設經臺 於是爲鳳獨書院).

54) "綿花記』 (규12076) 忠宣公三憂堂文先生木絲遺田表(金道和): 此故忠宣公三憂堂文先生始播木絲之遣   締崙---公之調孫承魯 適蔽是邦 又相土而廣其殖 使祖烈益影 則其繼世之功 亦足以有辭矣 於呼 信程   端播面穀 以救黎民之阻飢 而周請頌培程之功日 克配彼天 夫衣食一原也---公之高孫有環編田而居者日   煥河永永程福永 行過其辯 輪有情湯之心 將伐石而表其圈 與本脚士林諸公 誇謀協同 讀余記其事.) 『 ÷憂堂實記』(1900) 권6 年譜: 仁祖22年 建三峰書院(海西儒生 遂祠子役希脚桃源三峰山 以先生柱  履之地也).

56) F프臺堂實記』(1900) 권5 請從享文廟疏(製疏 生員驚伯達).

i7) F通川院蹟』 권2 請從글文廟流(檢巷 誘伯達):---(疏首 生員李福 掌議 幼學鄧仁宅 色掌 幼學朴明漢,羅  準愼 寫疏 生員金吉湖 奉流 幼學朴景時 讀流 幼學白時煥 正宗군予(1792) 奉疏入京 以邦禁不得進達).刻)':憂堂責記』(1900) 권5 請從추文廟再流(製流 朴尙合 疏首 鄭在慶): 伏惟念忠宣公臣文益漸 탄代難   遠 其遵學功德 炳人耳目 흐萬古而不濕者也---獨其配食聖庶 尙未暇擧者 晝爲聖깐之欠典 올類之慨歎   넌 批日 崇敬所以衛遵 沈固不待雨等之言 而隆庶事體至重 有不可遼許 其各知恣 退修學業.) 『 ÷臺堂實記』(1900) 권5 請從文廟疏(製疏 朴齋晩 疏首 幼學洪在誠): 批點 崇賢尊道 何待調等之   而所陳之末可遷允 以其事體之至愼至重也 霜等知恣 退修學業.)(請從享文廟關流(製疏 沈宜肅 疏首   各健秀): 伏見聖批 則以其事體之至愼至重 而尙新從享之敎 切輿情之齋潑 犬旋德禮賢化道所先念功   簡勞零 #=務德 乃沐明 沒而漏者---批聞 省疏具恣 前此已有批論 兩等亦飾事體之至臺 又何煩瀉 諒   患遇去.

쓿)) 『詰實錄』 권4, 2년 7월 漢寅: 初藝文館直提學鄭以吾 薦晋陽人文可學 有術能致雨 上使內官焉之   乘訓借至 上日 聞汝能致雨 爲予--薄焉 於是可學齋戒 自期三日 必得雨 至期雨 上使人命可學ET 更   致齋若何 可學詰關日 乘訓急來 誠敬未足 請更致齋於松林寺 翼日可學設閑脚 今日亥時始雨 明日大雨

출哀時果雨 翼歸雨 款乃賜끌學米及次--- 是以人多感焉 間某術則締 非予之所能爲也---又H 我自  少 倂誦神衆經 得眞道矣 凡生所굘願欲 皆在吾術中 其容珠常 崙遺忘?況憶者然.건) 『宗實錄』 권5, 3년 4월 癸讀 命文글탈 淸齋于松林寺 禮雨

   『太宗實錄』 권7, 4년 5월 辛讀' 출雨于宗廟社程嶽海濃名ㄴU大川 及瑞格殷 審理露獄 張値窮즈 液絡  埋潛 』使文 클學祈兩

   "宗實錄』 권9, 5년 5월 壬寅: 禮雨于宗廟찼程脚壇名iIJ大川 上以久旱 不御殷誇政 日益恐修崙  文可學駱H 臣人淸齋辯雨必得 士從之 系有小雨 然딨輕應而已.

(j그 ?宗賓綠』 권12, 6년 11월 辛未: 捕淡人文끌뿌 及其黨與 囚于巡禁司獄 命參贊議政府著崔츱트 爲  委常 與兼判義勇巡禁러事李就蓄尹視 刑舊刻書金希善 司憲執義崔府等轉之 글學晋州人 粗習太-算法  點謂前飾雨暇之徵 國人精有信之者 上召試之 拜書雲 視脚久而無效 斥埼之 居開城留後司 證誘愚民  密謂生員金藏幽 今佛法衰殘 天文屢變 吾誦神衆經入神 能役使鬼物 天兵神兵 不難致也 若得人兵 則  大多可擧也 藏然之 與前率常注薄任聘 生員趙方輝 前副正曺漢生 前少캇金亮等 皆信附之 遂謀作亂  任聘之母雲副司直趙民 知業謀以곰 捕可學及其黨 勳之 上謂群臣R 予謂學 爲讀狂者 天兵神兵 吾  能설꼰 此非狂者之言予 黃喜啓日 -可學雖譯.狂 其從之者 豈盡然牙 上謂轉獄官圖 今以굴學之故 無  뷰之人被囚者多 宜速分辨.

63) 『戈宗責錄』 권12, 6년 11월 辛米조 참조.

梨) 『太宗責緣』 권12, 6년 12월 庚子: 樣文可學任聘金亮金藏趙方輝曺漢生等于市 可學之子乳 亦處讀 初   글學等課逆 約事成之後 推可學爲主 藏爲左相 聘爲右相 方輝爲二相 漢生爲西北面都巡間使 夜會報恩   寺役開 告于諸佛神視 共拜可學爲君 使聘製敎書二道 買鉛鐵 造御印議政席印兵蓄鏡馬印奉使印等四類  謀使漢生 先至平壤爲內應 可學等 淡俱至平壤 可學僞稱都體奈使 藏僞稱都鎭撫 以十二月二十一日 殺   都巡問使 因起兵爲亂 旣定計 聘反自疑 問計於趙黑 民陽許之 遂以首告 獄成 可學等妻拏 皆連坐 獨  春聘之妻子兄弟 以趙長首告也.

65) 『世宗實錄』 권36, 9년 6월 減辰: 上憂旱 召左議政黃喜 右讀政孟思誠等諸大臣謂日 今觀禮曺救旱條   件 皆已行之事--- 緣坐之人 豈無露辯 然此先王所重 不可輕易施行---於是下敎 朴舊文可學金藏趙方   輝外 某餘犯罪緣坐人等 洋皆放送 在前外方屬賤親子 亦令外方 從便識燥還給者 一百十/)人放還 竹   處李賀權約.『世宗責錄』 권59, 17년 8월 乙巳: 傳旨吏兵暫 逆賊朴舊及文可學同黨外 他餘犯不忠人等緣坐者 際子   孫外 兄弟叔姪等 宜還職燥 是日還給李繼等十三人職濫.

66) 김영범, 「連坐側의 역사적 전개와 그 意味網-朝鮮時代를 중심으로」 『한국샤회사연구회논문집』 24,   문학과 지성사, 1990, 331면

67) 『雲窓誌』 「都山八妨考證」 3. 耳谷; 江城君益漸鄕弟文科及第益夏新 『之基也 益(夏: 첨자?)有二子 fl   可庸,可學 皆爲逸才 兆弟皆登文科 可庸爲學論 可學爲內輪 學在幼學時 自課爲學 其讀書堂基逃 在  於碧溪 溪上志山腰 時戒讀書於淨趣之腐---其後公與其兄可庸 皆豊第 遊於京師 其內輸時 不勝其?術  之所崇 化爲飛烏 入於禁中 有若赤鳳之端入燕樓닌 事覺補捉 以採術無道 腰新於市 努無遣種於木諦   而皆流讀於海曲 今東菜府文氏謄者 是也.

58) 『雲窓詰』 「悟理八妨考證」 8. 靜太; 古文化驛監文光瑞之基 光瑞乃江城君之剛世孫 無子 取妹夫博川   郡守李嗚之子承宗 養而爲子 承宗自三歲 寄養於文氏 長於斯 達於斯 官至黃州牧使 辛函年通經爲脚者   是也---文氏子孫 則散而之四方 其長子孫之在於丹城 而奉祀者 遂絶祀於光瑞 其業派之流末者 只有承  請起雲仁會德會焉 今江城君祠字 在於是埼者 以其有子孫之基 卽基之士而습祠焉.59) 『憂堂文益漸先生遺事』(1996, 영인해석본) 권2 完文: 右完議事 先祖忠宣公子行五長季 而大宗 文  化公證光瑞 不幸無調 先祖不視廟 傳奉于次長義城公講世華 又無調 移奉于第그子派宗孫鳳닌公證善昌  彦祥氏 値壬辰兵火 沒入灰據 至今未復 不祿香火 不廢而自絶.

70) 『三憂堂實記』(1900) 권5 請復不廟疏(장령 李燮): 第以世代玄遠 屢經兵翼 派讀散落 宗嬌絶統 祀禮  之鬪 不知在於何時 而往在先朝庚成(1730?) 因其後孫之上言 特診不히之盛典 訓功報本之命 讀然於絲  綜之間 特下議啓之命 而其時相臣 飾爲捕置 至今爲盛代之開典---臣請令該曺議啓 以卒先之遺志焉.71) 『三憂堂實記』(1900) 권5 請復不淋廟再疏(장령 朱重翁, 正宗丙辰 8월일): 違我先朝戊寅(1758) 御春塘臺  指示雲幕 而下敎于入持大臣日 文氏之功大矣 因命訪其奉祀孫錄用 而因循未果 我嚴下御極以後 累下致  祭之命 而賜額兩院 前後恩典 慕以加矣---惟是爲我國之人 故雖不得與論於農聾之祀 而其廟之不誤 已有  聖朝之特恩 而今其後孫零替 無以奉香火 其在思其功尙其人之道 誠爲羚側 惟我殷下 特加存佛之典.

 

72) ['÷憂堂文益漸先生遺事』(1996, 영인해석본) 권2 完文(道光21년 辛丑 10월17일): 右完議事---不香   火 不廢而自絶 嗚呼痛哉 惟我誇派 散離各遵 自中世有意美遂者久矣---何幸린肩氏 慨然於此 先發온  癩渡不히之議者 윤有年矣 今因墓産之會 在不勝退慕 象讀論同 」遵先世移宗之例 乃以次長派故學生   柱之幼學秉烈 凉爲摘長孫 期於圖復.

7)) ,? ÷憂垈文益漸先生遺事』(1996, 영인해석본) 권2 上書(甲辰(1844)7월일): 慶尙適激禮幼學文틴터 全羅  道寶城文桂 忠淸道洪州文時完等 謹齋沐百拜士書于大宗伯閣下---.

긴) 7臺堂實話』(1900) 권5 請復不廟三疏(忠淸慶尙全羅三道儒生上言, 疏首 任輦白. 哲군甲寅(1854)   ÷月歸 鄧承旨李源明入啓): 批日 該曺裏處 禮曺判書金補根 回啓日---今沈齋讀 不無依據 公儀所   存 恐當許施不視之典 事體重大 臣曺不敢讀便 令廟堂素處 何如.

7 「-÷憂堂文益漸先生遺事』(1996, 영인 해석본) 권2 上書(丙辰(1856) 9월 일). 寶城幼學文秉烈 綾州文   忍燃 長興文墓德등 謹齋沐上폴于巡相閣下 伏以生等先祖狂城潛流之類 在於慶尙道冷城 今將移安于   木速寶城地.

76) 『新增東國輿地勝覽』 권지, 丹城驛 違置沿革: 江城蘇 本新羅關支郡 景德王改關城 高麗改江城脚 後   復隆爲郡 顯宗屬晋州 恭讓王置監務 本朝恭請王朝 以橋需永善之漢珍辯來合 號珍城脚 世宗朝漢珍 還

은巨辯 丹漢脚---恭讓조還屬城 木朝딴宗朝 採兩脚奈 改今名 爲添監.77: 「麗史飾要』 권34, 恭讓골 元年: 趙凌刻脚 益漸本以遺逸 努耕晋鄧 以賢良拜諦犬未.   "꾼實緣』 권4, 2년 7월 庚寅' 初藝文館逐提學鄭以言 蘿晋陽人文可學 有術能致雨) -雲窓誌』 「元堂八翁考證」 8. 培養ㄴ14: 其後李成之居是妨者 其先江陽人也 尙書左崔射農芽之ㄴ代孫  늘參軍李季通者 姿及第文諒幕之女 來家焉 災?子孫之居者 雖無所芽華 世有謹助之士 有H源自號淪辯   行壇著 出入退溪甫冥兩先生之門 使狂城君行義功德 布場於-國 使兒責走卒 無不飾者 皆出於源.」 字濕, 『退溪集』 권42 記 前朝敎左司讀大夫文公孝子碑關記: 前後具事跡 而請識與記者 源也 而前之  識壞祠者 爲方丈山人曺植也 後之記碑關者 退溪老人李混也.

   --÷憂堂實記』(1900) 권6 年譜. 壬戌(1562)令人孫淸香堂李源 以令人狀議于親老 增置祠舍及祭類 脚  惰成遵 又以公羅益之.

00) 『프憂堂寶記』(1900) 권6 年譜 光海4年(1612) 重建道川祠(先時慕請甲子(1554) 丹城士林 以院基卑

有水患 移遂于差上-里之地 萬曆美辰 院宇燈于兵誤 其後二十一年壬子春 生員李誤率脚人 狀訴方伯  而啓聞 臺建祠字於遵川之別聖 顯宗壬子 移遷于先生玄孫光瑞所居之地.81) 앞의 주?) 참조

82) 李邦儉, 『道端述』 권9 道川書院通本脚各面各門中文(甲子(1864)7월17일); 到今秋享分辯之日 會席   定 騷雨業 第其庶床無乾 冠衣盡淡 一舍類陽 檀精如傾 窓壁欲類---卽定重修之議 霜伏惟在家禽   君子 其在--室順聲之應 想必無異同李否---伏願自各院享祀時 回論而可否之 以爲敦事完事之地.83) 李邦儉, 『道訓述言』 권9 道川書院通本辯文(乙丑); 右文爲奉告事 本院講堂酒庫之重修 幾至誌役 諦齋   典廳庫崙之新創 繼로營始 而기宇修蒼 第一時急 權奉講室 在所不已---在家崇尊當任諸員 不可不合席   對同.

84) 李儉, 『道烈述言』 권9 道川書院通列邑文(已修而未通卽止,乙丑); 生等怪恐憂恩 初不量力 忽成重辯之   議 驗奔相役 役至强半 而告流無由 將爲奈何 本添難逐戶出力 所收之數 斗小零星 本孫雖極力辯誠 所排   之美 計遲入手 憶無物不誠 不誠無物---如是略略排定 伏感禽君子 特以尊賢衛道之誠 刻恩報德之義.8i) 李邦僚, 『道端遠言』 권9 道川書院通陳川蛇洞文; 犬書院崇奉之道 一則子孫也 一則儒林也 凡於遷臺   芽苾之禮 以爲先之誠而修飾之 以尊賢之心而潤色之 而況莫重重修之盛擧予---各地本孫 其孰不?涉狹   助 而獨尊執事.

86) 李却儉, 『道測述言』 권9 遵川書院通南海校中文(乙丑:1865). 素目 등 참조.87) 李邦儉, 『道端述言』 권뜰 裏目; 又裏日---本孫宗錢所排六新兩段 計不入手 而就中南海源川文氏 自以   大先生培孫 漢拒憐惡 落落無分錢顧助之意云兩 則世豈有如許添先忘祖之孫牙---丹晋是河之民 收錢諸   有司 以樹治之意 齋狀仰擴於城主法庭是予脚 民等亦不無擴惡徵習之心 特以移文 捉繼之由 蒸敢仰素.88) 李邦儉, 『道端述』 권9 素目, 又棄本偉呂候重燮日---濫當急先還安 故以今月三十日定日是如 第伏

念國學書院享祀時 祭需官封之禮 談爲軸舊遵行是予則 今此遷奉時 祭物亦爲依前規處分 未知何加.89) 1道111院蹟』 권2 禮曺免稅關文(純祖T丑(1817)十-月): 湯曺爲相考事 請望啓內 丹城遊川書院儒生權   導國等望單內 本院卽江城君忠宣公文先生妥靈之所也 賜額書院三結촙土免稅 乃是國典所載 而先朝T   本院復額之後 以有土三結免稅출 堂曺望營 俱得題 而使本官査報 非止一再 而尙未接例施行者 今   汚 ÷十年之久 榮以法例 大是欠典---到卽査實啓聞 以爲依例免稅之地 宜當向事 關.90) A#通川院蹟』 序(丹城驛監鄭基永): 公之雲鉛 返設刊譜之役 事그竣功將誇 本添院有司李文儉李辯範 洋   徐以實蹟一규 鐘於粹而壽其傳 屬余以徵信之文 謂以適慕院任爲是之努.   『憂堂實記』(1900) 後識(손 宅鎬, 庚子(1900)): 不肖與族人浩懼 奉賞記而得檢校於丹城斯文權雲煥李   遼讓兩公 朝夕聚首理會---今노庚子春 設役於蘆山 而至秋斷手 若終始致幹者 李斯文鎭洙之力居多焉.91) ?錄』(완계서원 소장, 앞부분 상단 부분이 마별되어 있음)에 의하면 1644년 권도가 서거한지 5년   후인 1648년 진사 崔綱등이 봉장을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25년 후인 1672년 최경 등이 다   도천서원에 병향할 것을 요구하는 정문을 관에 올려 도천서원에 병향하게 되었다. 그 뒤 1700년   피를 주향하는 서원이 필요하여 그의 위패를 杜陵서원에 옮겨 봉안하였다가 서원신설을 금하는 법   령에 걸려 훼철되었다. 그러다가 1732년에 단성 사림들이 논의하여 다시 도천서원에 배향하는 것으   펄 하였다. 그런데 1787년 흐남에 사는 문익점 자손들이 도천서원에 관여하는 사림들에게는 논의하   지 않고 도천서원 청액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여 사액을 받아내었으나, 그것은 문익점에게만 해   당되었기 때문에 권도의 위폐는 졸지에 다른 곳으로 옮겨져야 했다. 이 때문에 단성지역 내의 사림  틀 사이에 상당한 분란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결국 동계의 위폐는 두룽서원이 있던 곳에 淸溪書院  이라는 이름의 서원이 세워지고 그곳에 봉안되게 된다.

92) 李邦儉(1798-1865), 『道測述言』 권7 道川書院通遵內文; 惟我忠宣公文先生---眞環東土 百世炳宗   果列聖朝屢降恩典 然而尙未得一番誇庶者 雖愚夫愚婦 莫不藍借 而況즘冠儒服儒者 其孰無抑驚慨恨于  中予 先生之本孫亨鎭 忠信誠責人也 今幸議及館儒 說涉千里 顧玆平日款慕之餘 烏得不業動哉 據所謂   公論所在 時代自有者 此也 玆以發文 伏雇禽君子 一心定議 齋聲叫關 以幸斯文之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