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남 곳곳에 큰덕 기리는 유적들

역사의 인물탐구 집중기획- 시사월간 win 기자 김일곤


문익점의 유적은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다. 한민족의 기림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공덕이 온 나라 안에 미쳤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와 그를 도와 목화의 재배와 보급에 힘쓴 장인 정천익이 사적을 찾아보았다.


96년 개관될 목면시배지 기념관
지리산 자락이 길 게 뻗다가 남강을 만나 멈춘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 문익점이 태어난 고향이자 목화를 처음 재배한 목면시배지다, 사적 108호로 건립됐고 88년부터는 기념관 건립을 비롯한 사적 정비사업이 시작돼 8년째 진행중이다. 30억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중 200여평의 전시관은 이미 건물이 세워져 단청작업만 남았다. 그러나 예산지원이 원활치 못해 당초 93년 완공예정이었던 것이 96년 개관으로 늦춰졌다.
마을 노인회관에서 만난 이병태(李炳泰.85)옹은 선생의 생가터가 있다며 취재진을 안내했다. 마을회관에서 안쪽으로 들어가 1백평 남짓한 집터에 아담한 기와집이 단정하게 들어앉아 있다. 넓은 앞마당에는 갖가지 채소를 심어 가꾸는 텃밭이 있다. 다른 쪽에는 감나무 아래 우물이 있다. 한창 농사철이라 어른들은 들에 나가고 꼬마들만 방학이라 집을 지키고 있다 낯선 손을 맞는다
생가터라고 전해오는 이 집은 사월리 529번지로 현재 이병미(李炳美)씨의 소유로 되어있다. 물론 집은 옛집이 아니고 당시 문익점의 자취 또한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나지막한 동산을 등지고 산간치고는 넓은 들을 바라보는 집터는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명당이란 느낌을 주었다.
생가터 이웃에는 문익점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다. 현재 산청군 보호수로 지정(1982)돼 있는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610년 정도로 아직도 왕성하게 잎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원 뿌리가 한동안 죽었던 것처럼 보였는데 되살아나 후손들이 단을 쌓고 해마다 섣달 그믐이면 제를 올린다.
문익점 생가가 있는 배양마을에 현재는 문씨 일족이 한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외손인 합천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이 합천이씨들의 세거지로 변하게 된 것은 문씨들이 후대에 이곳에서 모두 떠났기 때문이다. 대신 마을은 선생의 외손가인 합천이씨들이 지켜왔다. 이병태옹의 말이다.


문익점을 모신 도천서원 신도비
문익점의 자취는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병능 산청문화원장은 문익점후손들이 기림보다 후학들의 기림을 더 받았다 이는 선생이 남긴 발자취가 그만큼 컸다는 의미한다. 고 말한다.
문익점은 목화의 전래자로서 뿐만 아니라 훗일 우암송시열의 말처럼 안향과 더불어 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앙받았다. 문익점의 서원등이 훼손될 때마다 사림들이 상소하여 상소하여 이를 중수하는 정성을 보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진주에서 원지를 거쳐 산청읍으로 가는 국도변에 있는 문익점선생 목면사적지에는 문익점 선생을 모신 도천서원과 신도비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신안면 신안마을에 속한다. 신안면에 사는 24대손 문병운씨는 마을 안 월성초등(교장 하대규)에서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씨는 이학교에 삼우당 교실이 있다며 돌아보기를 청했다. 한때 전교생이 500여명에 달했던 이 학교는 여느 농촌학교과 마찬가지로 학생이 50명 정도로 줄어든 미니학교다. 방학중이기는 하지만 운동장에는 동네 꼬마들이 한명도 보이지 않고 매미소리만 요란했다.
72년에 처음 문을 연 삼우당교실에는 문익점 선생과 조선왕조의 대유학자로 이지방에서 많은 제자들을 기른 남명소직 선생의 행적등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특히 목화의 실물 목화씨를 빼는 씨아 물레 베틀 등 무명천을 짜기위해 필요한 모든 과정이 실물대의 작업인형과 함깨 재현돼 있어 눈길을 끈다.
삼우당교실을 둘러본 후에 바로 이웃해 있는 도천서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도천서원은 문익점 사후 향리의 선비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원래 문익점이 말년에 은거했던 도천가에 지었던 것인데 중간에 소실되는 바람에 중건하며넛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도천은 지금도 도내라 불리는 곳으로 집현산 아래 양천강가를 말한다. 도천서원에는 문익점의 영정이 있다. 당초 문익점의 영정은 영남의선비들이 중종6년(1511)에 두벌 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벌은 도천서원에 한벌은 선생이 어릴 때 글을 읽었던 벽계서원에 모셨는데 임진왜란때 모두 불탔다고 한다. 현재 도천서원과 장흥 강성서원, 광주의 광동영당 등에 모시고 있는 영정은 모두 그 후의 모작이다.
서원 왼편 산자락에는 선생의 묘소가 있다. 경호강 너머로 지리산 주봉을 바라보며 서향한 묘소는 첫째부인 팔계주씨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최근에 묘비를 단장하면서 새로 세운 석물들이 오래된 석물들과 나란히 서있다
문익점의 묘소 바로 아래에는 합천 이씨 일족의 묘소 세 기가 자리하고 있다. 맨 아래쪽에는 이퇴계, 조남명과 동갑친구인 청향당 이원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청향당은 문익점의 손녀인 문씨 부인의 손자로서 도천 서원의 중수에 공이 컸다. 배양 마을과 마찬가지로 외손인 합천 이씨가 170여년간 외손봉사를 한 적이 있어 문익점의 묘소 아래쪽에 이들의 묘소가 자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도비각사적지 입구 커다란 소나무 아래에는 신도비각이 있다. 이 신도비는 순조 34년(1834)에 경기도 강화도 앞바다에서 캐낸 돌을 옮겨와 글을 새겨 세운 것이다. 목화가 한민족 모두에게 혜택을 준 것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운반길에 자리한 각 고을의 수령과 보부상들이 모두 나서서 3년여에 걸쳐 등짐으로 운반했다고 한다. 신도비는 원래 종 2품관 이상의 무덤 앞에다 그의 공적을 기려 세우는 것이다.


목화의재배와 전파에 공헌한 정천익의 추적할 길 없는 생애
신도비에는 문익점과 함 께 장인인 정천익의 기여도 언급하고 있다. 진양 정씨 집안에서는 고려사 등의 기록에 따라 정천익의 공로를 인정받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을 기울여왔다. 조선시대에도 진주 사람들은 도천서원과 연락을 하며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장인과 사위라는 관계 때문에 서열을 정하기 어려워 도천서원에 함께 향사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국사편찬위원회와 비서실 등에 지시하여 진양 정씨 문중의 청원에 대한 사실 조사를 명하고 그에따라 유방백세 라는 휘호를 내렸다.
산청에서 취재 도중 우연히 만난 정현택씨(남명학연구원 이사)는 진양 정씨 문중의 24대 종손. 마침 남명 조식을 모신 덕천서원에서 성균관 한림원 학생들의 하계 수업이 있어 이곳 일을 맡아보고 있는 그도 산청에 머물고 있었다. 정씨는 당시의 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남평 문씨 문중이 시배지 기념비를 세우면서 모든 공을 문익점에게 돌리고 정천익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죠. 시정을 약속받았으나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 따로 비 건립을 추진하게 된 겁니다.
청계서원은 원래 진양군 대평면에 있었으나 진양호 건설로 수몰지구가 되어 진주성내 현위치로 옮겨온 뒤 정천익의 사적비도 세워졌다. 양 가문의 감정대립은 이후로도 한동안 계속되었으나 양 가문 출신 정치인들에 의해 중재되어 현재는 서로 인정을 하고 있는 상태다.
정천익인 단성현 소남에서 태어나 배양마을로 이사와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양마을에서 지리산쪽으로 더 들어가다 보면 감나무와 고택으로 유명한 남사마을이 있고 그에 조금 못미처 관정마을로 들어가는 소로가 나타난다. 진양정씨 일족이 아직 지키고 있는 이 마을에서 만난 정태은옹은 기자에게 마을의 내력을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옛날 우리 조상분 중에 관정이란 아호를 쓰는 분을 따라 관정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게 6백년 전의 일이다. 정천익 선생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 그 후 배양으로 이사가서 살았다. 때문에 목화시배지는 현재의 배양마을이 맞다" 정옹은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정천익이 문익점의 어린 시절 천자문 선생이었으며 나중에 사위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고 말했다. 지금 관정마을은 논이 많지만 과거에는 마을 입구의 논도 모두 밭이었다. 수리조합이 생기면서 마을 앞길이 있는 곳에 둑을 쌓아 물길을 내는 바람에 그 좋던 우물마저 말라 버렸다고 한다. 지금은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고 있다. 정옹은 관정리의 내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당초 관정 선생이 이곳에 자리잡은 후로 쭉 세거하다가 임진왜란 전에 진양 대평쪽으로 옮겨갔다. 관정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2백여년 전이었다. 돌아와서 마을을 복구하는데 옛날에 밭이었던 저 앞 논에서 정자만 남아있는 비석토막을 발견했다고 한다. 분명 집안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아 논들을 전부 뒤엎다시키 했지만 결국 본체는 찾지 못했다.
이로 보아 관정마을이 진양정씨들의 역대 세거지였으나 병랸을 비해 일족이 이동하는 바람에 조상들의 발자취를 찾기 힘들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천익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 문익점전의 일부 기사 외엔 그가 지었다는 한시 한 구만 전해오는 이유도 설명된다. 진양 정씨 문중에서 펴낸 청계지를 보면 정천익과 문익점간에 화답한 한시 한구가 남아있다.

"세상일 어지러워 돌아보면 무엇하리 / 대와 솔 푸른 그늘 뜨락에 가득한데
/ 바람에 그윽한 뜻을 맡겨두고 사느니"(정천익)

"산 이내 물에 어려 갈매기 하얀 날래 / 숨어서 사는 이 몸 뉘 있어 날아주리
/ 골짜리 깊숙한 숲속 드높은 뜻 기르네"(문익점)

옹서간 화답한 시의 세계는 얼마나 높고 맑은가.
취재도중 만난 한 사람은 남평문씨와 진양 정씨 가문의 분쟁을 한마디로 "의식이 아직 씨족사회에 머무르고 있다"고 평했다. 전국에 산재한 문익점의 사적은 수없이 많지만 특히 전라도 지역은 면포의 최대산지였던 관계로 한번 둘러볼 필요가 있는 곳이다. 발길을 돌려 전남 장흥의 강성서원으로 향했다.
장흥읍의 입구격인 유치면에서 월천을 건너자 동네 아낙들이 정자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다. 우람한 은행나무가 좌우로 늘어선 강성서원에는 홍색 관복을 입은 문익점의 영정이 봉안돼 있다. 이 영정은 복식과 관모가 당시의 관작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영정을 모신 숭덕사 문 옆에는 문익점비로 잘못 알려진 문암 문위세의 신도비도 서 있다.


온 나라에 두루 미친 목화의 공덕
강성서원은 숙종 28년(1702)에 창건되어 정조 9년(1785)에 사액되었다. 3백50년이 넘은 커다란 은행나무가 두 그루 서 있는데 이는 문익점의 13대손 문천우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취재진의 발걸음이 지체되는 바람에 하루종을 서원 앞 정자에서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가 있던 문태열옹을 마을회관 앞 정자 위에서 만났다.
"원래 강성서원에 모셨던 분은 풍암 선생이다. 그 분은 퇴계 선생은 제자인데 퇴계 선생이 유독 그분에게만 병서를 주어 익히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창의해서 큰 공을 세운 분이다. 나라에서 파주목사를 제수했지만 병을 핑계하고 은거했다. 그런데 문익점 선생을 합향하게 되면서 후에 사액받게 되었다"
문옹은 조상인 문익점이 "유학자요 충신이며 효자이면서 목화로 온 백성을 따뜻하게 입힌 겨레의 은인"이라며 이야기를 푸러나갔다. 문묘에 배향하기 위해 사림이 상소를 올린 대목에서는 "아무리 그 공덕이 커도 선비가 할 일은 아니었다는 거지. 그래서 끝내 배향은 못했지" 하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선비가 할 일 가운데 백성을 편안케 함보다 더 중요한 일이 따로 있을지 생각해볼 대목이다.
보성에는 문익점을 모시는 부조묘가 있다. 부조묘란 영원히 폐지하지 못하는 사당으로 태종의 명에 따라 처음 세워졌으나(태종원년인 1400년) 후사가 이어지지 못해 제사가 끊기는 등 여러차례 우여곡절을 겪다가 철종 5년(1854)에 보성의 도개리에 다시 세워졌다.


의성 목화시배지
경북지방도 전라도지방과 더불어 목화의 대량생산지였다. 경북 의성에는 한말 융희3년(1909)에 세운 "충선공 삼우당 문선생 목면유전표비"가 금성면 제오리에 있고 일제시대에 세운 "충선공 부민후 강성군 삼우당 문익점 선생 면작기념비"가 금성면 대리에 있다.
"이 지방의 구전으로는 조선 태종때 손자 승로가 의성현감으로 고을살이 하러 왔을 때 문익점이 손자를 보기 위해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때 의성의 토질이 금주성과 비슷한 것 보고 목화를 재배했다고 한다. 의성문화원 이중헌원장이 굳이 구전이란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동안 이를 고증하기 위해 국조방목 등 자료를 검토해봤으나 문승로가 과거에 합격했거나 벼슬에 올랐다는 기록을 찾지 못한 때문이란 것이다. 문승로의 동생이 등과했으나 의성지방에 고을살이 한 적은 없었다. 이 이야기는 교남지와 의성승감 등에도 기록돼 있으나 모두 일제시대에 세운 "면작기념비" 이후에 엮어 진 것들이라 사료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한다. 지금은 목면유전표비의 바로 곁에 노인회관을 짓고 주변도 시멘트로 발라 볼품없이 됐지만 이 고장에서 면화재배가 성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의성군 금성면 대리에 있는 일제시대 때 세운 면작기념비는 그 내력을 이렇게 적고 있다. "... 조선 태종 때 그의(문익점의) 손자 승로가 의성현감으로 부임하여 금성면 제오리에 면화를 파종하여 오늘에 전하게 되었으며 1909년에 지역주민들이 파종한 밭자리에 기념비를 건립했고 다시 1935년에 금성면 대리의 현 장소에 기념비를 세워 널리 알리게 되었다.

역사적 사실로 고증되지 않은 내용을 그대로 비에 새긴 경위를 이원장은 이렇게 해석했다.
"의성은 예부터 면화의 생산량이 국내 으뜸가는 곳이었다. 이 비가 세워진 1935년은 중일전쟁 도발을 앞두고 일제의 면화공출독촉이 심해지던 때였다. 결국 이 비 건립에 참여한 인사들이 일본인들과 이 지역의 친일파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면화공출을 독려하기 위한 술책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심이 든다.
문익점의 유적지는 전국 곳곳에 흩어져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확인한 문익점 제향서원만 13곳에 이른다. 우리 역사상 인물 중 후세 바람들에 의해 널리 추모되기로는 모시는 사당 등으로 따져볼 때 문익점 선생과 최영 장군이 쌍벽을 이룬다.
최영은 고려말 외적과의 전투에서 전승을 기록한 명장이자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만주 옛땅을 회복하려다 뜻을 펴지 못하고 돌아간 민족의 영웅으로 특히 남,서해안지역에 그를 모시는 당집이 많다. 그런 최영과 더불어 문익점을 기리는 사당이 많다는 사실은 그가 민중들로부터 얼마나 오랫동안 두텁게 사랑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