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前期 綿織業의 발전과 生活文化의 변화

李正守 동서대교수


 머  리  말


고려말과 조선초는 한국사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로 주목된다 농업에 있어 시비법발달 품종개량으로 인해  水田의 速作常耕法의 실현과 早田의 根耕法과 2년 3작법의 실현 그리고 면화재배는 농업생산력의 획기적 발전을 가져왔다.

또한 대내외 정치적 안정과 함께 왜구의 활동이 진정되면서 연해안을 시발로 점차 북방지역까지 경지 개간이 확대되는 경지의 대개간이 진행된 시기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중국에서의 元,明의 교체와 일본에서의 남북조 내란의 종식등으로 인해 평화적인 대외관계가 형성되는 시기였다. 이런 가운데 인구증가 현상이 두드러졌으며 지주제와 유통경제 발전의 기초가 형성되는 시기였다.

특히 여말에 와서 재배에 성공한 면화는 우리나라의 산업발전과 의생활에 있어 혁명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 본격화된 면포의 생산은 정부 재정과서민 생활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이 시기 면포 생산 증대는 국내 경제의 성장과 함께 본격화된 대외무역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朝-中-日 삼국무역의 발전에는 조선의 綿布와 일본의 銀이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면포가 갖는 사회?경제적 중요성으로 인해 다양한 시각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지금까지 여말 선초의 목면과 관련된 연구 성과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몇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목면의 전래 시기와 장소 그리고 목면 산업 형성에 있어서의 문익점 일가의 역할에 관련된 문제,


  둘째, 농서나 농업기술상에서의 太綿 耕種法에 관련된 문제,

  셋째, 면업 정책과 면직업의 발전에 관련된 문제,

  넷째,면포의 유통과 기능 및 그펄이 미친 사회?경제적 영향에 관련된 문제 등으로 나눌수 있다.


여기에서는 조선전기 면업의 발전과 대내 유통경제의 진전과 대외무역의 발전에 따른 면포의 수요 증대 문제를 살펴보고, 나아가 면포 생산의 확대가 국내의 생활문화상에 미친 영향을 사치 경향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綿織業의 발전

 우리나라에서 목면이 생산되기 이전에 주로 생산편 의료는 絹織物과 苧麻織物이었고 그 밖에 毛織物도 일찍부터 생산되기는 하였으나 그 양은 많지 못했다. 1) 

전 세계에서 면 품종은 여섯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중국에 전해진 것은 두 종류이다.

하나는 원산지가 인도인 亞洲면(本棉, Bombax tree)이고,

또 하나는 원산지가아프리카인 非洲면(草棉, Gossypium)이었다. 전자로 짠 직물을 桐華布라 하고, 후자는 白첩布라고 한다. 2)

우리나라의 목면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이른 것은 신라 경문왕 9년(869)의 당나라에 대한 진헌품 가운데 白첩布가 보인다. 3)


그 후 고려 혜종 2년(945)에 고려에서후진에 보낸 공물 가운데 또 백첩포가 보이고 있다. 4)

이것 이외에는 목면 관련 기록은 고려말이 되어야 볼 수 있다. 그래서 신라말 고려초의 중국에 진헌한 목면이 과연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아마도 목면은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은 높았을 것으로 생각되나 재배에 성공하지는 못하였다고 생 각된다. 5)


 그런데 1363년(공민왕 12)에 좌시중 李公遂의 書狀官이 되어 元에 갔던 文益漸이 원으로부터 목화씨를 가지고 와서 목화 재배를 성공함으로써 우리나라의 衣料産業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1375년(우왕 1)에 전의주부에 임명되고 이어 벼슬이 좌사의대부에 이르했으며, 조선왕조 개국 후 다시 참지의정부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江城君으로 증직하였다. 6)

또한 1410년(태종 10)에는 사간원에서 올린 시무 8조 가운데 경대부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이용하 의복의 원료인 무명을 보급한 문익점의 공로를 다시금 높게 평가하여 祠堂을세우고 祭田을 지급하자'는 건의가 나오기까지 하였다. 7)

목면은 絹, 麻 苧 등의 제품에 비해서 美麗하면서도 그 견고한 점에 있어서 우수하고, 寒氣를 막는 보온성과 습기를 흡수하는 점에서 뛰어났다.

이러한 실용성 이외에도 기존의 다른 직물을 대체해 급속히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경제성이 뛰어났다는 점이다 목면은 다른 어떤 직물을 직조하는 것보다 훨씬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방적과정에서 같은 양의 실을 만드는데 면은 마나 저, 견 등에 비해 1/5 정도의 노동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8) 이러한 직물업에 있어서의 노동생산성 향 상은 농가경제와 국가의 재정에도 큰 보탬이 되었기에, 민간에서 뿐 아니라 정부에 서도 적극적으로 면화 생산을 장려하였던 것이다. 9)


  목면 재배의 확대에 있어 초기에는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과 지원이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정부는 米穀 생산 증대책과 아울러 면화 재배 장려책도 적극적으로 추진 했다. 정부는 지방관들이 면화의 재배를 민간에 적극 권장할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 였다. 정부의 면화 재배 정책은 남쪽 지역에만 머물지 않고 I5세기 초반 세종대 이 테 북쪽 지역까지 적극 추진되어,10) I5세기 후반 성종대에 와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황해도?평안도의 後民들이 북쪽 지역에까지 면화를 심어 이익을 얻고있었으며, 정부에서도 下三道에 각기 면화씨 20碩을 준비시켜 영안도?황해도?평안도에 보내어 심게 한 후 관찰사로 하여금 그 수확 상황을 보고하게 하고 있다. 11)


이처럼 정부의 면화 재배 장려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I5세기 중반경에는 이미 면포는 마포를 대신하여 민간의 주요 의복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12)

16세기로 들어오면 綿花 재배는 남부지역에는 이미 폭 넓게 퍼져서 旱田 외에 심지어 논을 떼워서 綿花를 심는 경우도 있어 오히려 문제가 될 정도였다. 13) 면화 재배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정부에서 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처럼 綿業은 이제 농가의 경제력을 신장시킬 수 있는 주요 부업으로 빠르게 정착되고 있었다. 그 결과는 16세기에 발간된 農書의 木綿耕種法 수록으로 나타났다. 14) 그리고 민간에서는 綿花 생산의 확대와 綿布 직조의 증대를 가져와, 면포의가격도 점차 낮아졌다. I5)


 하지만 16세기까지는 정부의 지속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부 지방의 경우 평안도를 제외하고는 함경도?황해도 등은 여전히 기후나 土性 등의 이유로 인해 목면 재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6)

여전히 북부 지방은 綿布의 자급자족이곤란하여 남부 지역에 의존하는 비을이 상당히 높았던 것이다.


              2. 綿布의 需要 증대로 국내 流通經濟의 성장

면포의 수요는 크게 실물 용도인 의복이나 기타 잡물의 원료로 사용된 측면과 국내외 유통경제의 발전과 함께 화폐나 상품으로서 사용된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I5세기 말부터 생산력의 발전을 기초로 한 지주제와 유통경제의 진전이 뚜렷해졌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농촌내의 자급자족적인 교환경제 체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地主制와 貢納制 발전은 유통경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있었다 토지 집적을 통해 확보된 대량의 米穀?木花 등 생산물이 시장과 연결되어 처분되지 못한다면, 토지 집적은 큰 경제적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16세기 대토지소유의 진행이라는 이면에는 이러한 시장기구의 발달이 전제되고 있었다. 17) 

당시 營利를 목적으로 하는 상품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상품교역의 장소로서 주목되는 것은 場市였다. 극심한 흥년으로 구황미를 마련한다는 이유로 전라도 일부 지방에서 처음 허용된 場市(성종1년, 1470년)는 곧이어 他道로 확산되었다. 하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된 장시는 16세기에 들어와 점차 諸邑 ?諸郡에까지 개설될 정도로 급증하였다. 당시 사정을 南○은 '방방곡곡에 市場이 서지 않는 곳이없을 지경이어서 이로 인해 物價가 등귀하고 있다'고18)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場市가 확산되자, 정부내에서도 장시 개설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당시의 場市를 둘러싼 논의는 크게 그것의 개설을 반대하는 務本抑末論입장과 찬성하는 小民保護論 입장의 두 가지로 진행되었다. 대체로 장시 개설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전통적인 務本抑末의 원칙하에 농민들이 상업활동에 편입되면서 농업을 버리고 末利만을 추구하여 田畓이 황폐화되고 物價가 등귀하거나 盜賊이 증가하는 등 폐단이 많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장시 개설을 긍정하는 입장에서는,당시가 凶荒의 타개와 飢民 賑恤의 한 방편으로 도움이 되며, 또 小民들이 有無相遷하므로 資生을 의지할 수 있는 곳이라는 입장이었다.


  당시 장시 개설 주장이 특히 힘을 얻고 있있던 것은 유교적 통치이넘을 기반으로한 정부의 爲民政治가 현실적으로 잘 운영되지 않는 실정에서 小民의 생업 공간으로 場市가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場市에서 교역된 물건은 대부분 농촌내에서 생산 ? 제조되는 품목들이었고, 그 지역내에서 생산되지 않거나부족한 물품은 상인들에 의해 다른 지방이나 장시에서 운송되어 거래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衣食에 필수적인 穀物과 布가 중심이었다. 場市는 소농층의 생활과 밀 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발전하고 있있던 것이다.


  한편 교환경제가 발전하자 화페에 대한 관심도 높아갔다.

물품화페인 米 ?布 이외에 명목화폐인 銅錢, 楮貨 등의 유통에 대한 정책적인 노력도 다양하게 시도되었다하지만 사회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민간유통에서 명목화폐는 거부되고, 15세기 후반 이래 점차 綿布가 기존의 摩布를 대신하여 통용화폐로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19)


면포는 일반적인 민간에서의 거래뿐만 아니라 국가의 조세 납부에도 통용되었다.  당시 통용된 규정 綿布 1필은 升數가 5升, 길이가 35尺이고, 넓이가 7寸, 1升?의 올數는 80가닥이었다. 20) 국가에서는 당시 통용되던 布幣를 國幣로 인정하여 나름대로 관리?감독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國幣는 크게 3등으로 나누어 유통시켰다. 그가운데 布幣는 5升布를 상등으로 하고 3승포를 중등으로 하였으며, 楮幣를 하등 화폐로 규정하였다. 하지만 실제 민간 유통에서는 저폐는 거의 유통되지 않았고, 3승35척 미만의 ○布가 저화의 위치를 대신하였다.


2) 對外貿易의 발전


I5S세기 말경부터 對外貿易은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되었다. 21) 그것은 이 시기에 유효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국내외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I5세기 말경 조선에서는 여러 가지의 사회경제적 변동이 있었으며, 그리고 일본에서는 무사?상인층을 증심으로 고급 비단과 면포에 대한 소비가 확대됨과 동시에 16세기경부터 광산의 활발한 개발로 인해 막대한 양의 金?銀?銅의 생산이 이루어졌다. 중국에서도地丁銀制 등 세제의 개편과 재정운영의 변화에 따라 銀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이에 조선은 국내의 사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다량의 고급비단,도자기, 약재, 서적 등을 수입했고, 일본은 고급비단과 면포의 생산이 전무한 상황에서 그 국내 수요가 늘자 胡椒蘇木이나 銅?銀 등을 결제수단으로 삼아 조선 면포와 중국 비단 등의 물품을 조선으로부터 수입했다.


  13?16세기의 대일 수입품은 蘇木, 胡椒, 유황, 銅, 銀 등으로 매우 다양했다. 그리고 대일 수출품으로는 직물류가 중심이었다. 22)

I5세기 중반 이전까지의 교역품은주펄 일본의 소목, 호초, 유황, 동 등을 수입하고 綿紬, 저포 마포 등을 수출하였는데 특히 마포가 주요한 답사물이었다.


  하지만 15세기 중엽부터 倭使에 대한 답사물로 마포를 한다는 원칙이 점차 변화를나타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내의 면포 생산량의 증가와 일본의 적극적인 綿布 사여 요구에 기인하였다. 실제 1464년(세조 10)에 정부가 大內殷 使行의 銅?○에 대한 대가로 綿布 542필과 庶布 1,080필을 주자 그들은 마포는 쓸 데가 없다고 받으려 하지 않고23) 끝까지 면포의 사여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傍使들이 마포 대신 면포를 적극적으로 요구한 것은 당시 일본의 국내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일본은 우리에 비해 면업의 성립이 I~2세기 정도 뒤떨어졌으며 목화 종자도 우리나라에서 전래되었다. 24)

일본은 면포가 수입되기 이전에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마포와 견직물이 대중적 의료였다. 그리고 상류사회에서는 明과의 조공무역이나 상인들을 통하여 수입된 중국산 고급 견직물에 대한 수요가 켰다 하지만 I5세기 후반 이래 일본 국내경제의 성장과 함께 무사층이나 상인층을 중심으로 의복 등에 면포의 사용이 늘어나면서 면포의 수요가 확대되었다. 면포는 수입품인 이상 비교적 고가였기에, 그 사용은 서민들 보다는 무사,, 名主, 승려 등의 사이에 수요가 되었다. 그러나 應仁의 亂(1467년) 전후에 조선 무역에 있어 綿紬 보다는 綿布로의 전환이 있었고, 보다 양질의 면포가 수입됨에 따라 품질뿐 아니라 수요의 계급적 한계성을 벗어나 점차 京都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사회의 생활속으로 침투되었다. 25) 이에 왜상들은 조선과의 무역에서 綿紬(명주)보다는 이윤이 훨씬 많은 綿布를 선호하고 적극적으로 요구하였다.


 15기 말에 와서 대일무역은 양과 질에 있어 큰 변화를 보였다. 우선 倭使들이 가져오는 商物의 규모가 커지고 그 품목도 금, 은, 동, 납, 유황 등 광산물과 소목,포근 등으펄 다양화되었으며, 조선의 답사물도 마포 대신 綿布가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1503년(연산군 9)에 金甘佛 등에 의해서 鉛銀術이 발견된 이후조선내의 端川 ?永輿 등 광산 개발이 적극화되면서 국내산 은과 수입 倭物이 使行과 商人을 통해충국으로 유출되는 朝-中-日 삼국무역 체계가 형성되었다.

16세기에 들어와 일본인들의 '來獻土宜'가 상업적 성격을 한충 뚜렷하게 나타냈고 무역의 규모도 훨씬 커졌다. 특히 왜객들이 가져오는 銅과 蘇木의 양이 급격하게 늘어 1500년(연산군 6)에는 대마도주가 한 번에 銅 11만 근을 보내어 공무역하기를 청하였다. 연산군의 즉위와 함께 왕실의 사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계속적인 倭物뿐 아니라 中國産物의 수입도 급격히 늘어났다. 反正을 통해 즉위한 中宗은 燕山君의 廢政을 일소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대일 통교 규정의 엄격한 운영을 꾀하여 恒居倭, 對馬島民들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그 결과 1510년(증종 5) 4월에 삼포왜란이 일어 났다. 26)


  함포왜란 후 소강 상태를 보이던 대일무역은 1525년(중종 20)경을 전후하여 다시 한번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첫째, 倭使들이 가져오는 商物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로 늘어났고, 조선 정부의 무역 규제가 보다 강화되자 무역의 패턴은 공무역 중심에서 사무역,밀무역으로 옮아갔다. 둘째, 倭銀이 급격하게 조선에 유입되면서 국내 유통 銀의 증심은 端川銀에서 倭銀으로 바뀌었다.27) 이에 따라對日貿易은 기존의 綿布 對 南海物産에서 綿布 對 銀 교역체제로 방향을 전환했던것이다. 셋째, 조선의 왕실과 지주층을 중심으로 한 사치경향이 저변층까지 확대되고 사치품의 고급화가 추구됨에 따라 中國産物을 무역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銀이 조선으로부터 중국으로 유출되었다. 이에 따라 銀을 단일 결제수단으로 하는 삼국무역 체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증종 즉위 후 약 20년간 소강, 갈등 양상을 보이던 대일무역은 1522년(중종 17)경부터 대마도와의 관계를 화해시킨다는 구실로 日本國王使가 빈번하게 도래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523년(중종 18)에 일본 국왕사가 무역한 면포의 양이 10만필에 육박했고, 1525년에도 가져온 商物의 가격이 8만 5천 필에 달하였다. 또한1328년에는 小二殿과 日本國왕使가 잇달아 내왕하여 공무역한 수량만도 면포 8만 1천 5백필에 이르렀고 사무역한 수량은 공무역의 배나 될 것으로 추정되었다. 28)  한편 1540년(중종 35)경 대일무역에 있어 획기적 변동이 일어났다. 대일 교역품이기존의 銅鐵, 胡산 등에서 銀 중심으로 바뀌었다. 실제 1542년에 일본 국왕사 安心東堂 등이 가져온 商物은 銀 8만 냥과 硫黃 20만 근으로 그 가격만도 官木 약 4십5만 필에 이르러, 무역한 것이 많아 왜선 3~4척에 다 실을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이 무렵에 일본인들이 공무역에 의하여 한 해 동안 가져가는 綿布만도 선박으로 6O~7O척 분이나29) 되었다. 당시 공무역 보다는 사무역?밀무역이 휠씬 더 많았을 것으초 생각되기에 공무역에 이들 수량을 합치면 엄청난 양의 면포가 일본으로 유출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왜은의 대량 유입으로 인해 국내의 銀 가격은 급락했으며,30) 赴京 使行들이 倭銀을 대량으로 소지하고 가서 明과 무역함으로써 사회 전반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처럼 국내에서 왜銀의 가격 폭락으로 인해 정부와 왜使간에 수차 제기된 交易價의 마찰은 결국 1544년(중종 39)의 蛇梁왜변을 일으키는 중요한요인으로 작용했다.


 사치풍조의 확대

 국내 유통경제의 성장과 삼국무역의 발전 결과 국내의 富는 전례 없이 증대되었다. 사회 전반에 걸친 富의 증대와 교환경제의 침투는 소비의 팽창을 가져온다. 대개의 경우 소비 수준(구매력)이 올라가면, 量만이 아니고 質의 면에도 소비물자의고급화가 진행된다.


  木花 이전 우리나라의 의복 원료는 桑, 李, 庶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명주는겨울용 의료였고 값도 비쌌으며 모시와 삼베는 여름용 의료로 적당하였음에 비해 면포는흡습성과 보온성이 뛰어나 사계절 의료로 적합하였으며 값도 저렴하여 실용성이 매우 뛰어났다. 이에 목화가 전래된 이래 면포는 貴賤할 것 없이 보편적 의료로서 재빨리 정착하게 되어 서민 생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특히 겨울철에 추위로 인한 질병 등에 취약한 서민 생활을 크게 개선시켜 주어 수명 연장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31)


  조선 정부는 국초부터 유교적인 검약의 실천을 강조하였지만, 대내외 경제의 변화와 함께 지배층을 시작으로 점차 사치 풍조가 일어났다. 사치의 시발은 의복에서부터 나타났다. 조선초까지 대부분의 소농층은 白衣를 착용하였지만 양반 사대부층이나 女官, 樂人 등 色服을 착용할 필요가 있는 경우는 黃,,紫, 紅, 靑 특히 紅色을 널리사용하였다. 당시 홍색의 草木染料로 국산으로서 대표적인 것은 紅花를 들 수 있다.紅花染色은 大紅이라 하여 면포 염색에는 적합하고 무난하였으나 그 생산량이 그리 많지 못하여 高價였다.


  그런데 일본에서 수입된 蘇木은 기존의 經花 부족을 보완하거나 혹은 대체할 수 있는 염료로 각광을 받았다. 당시에는 紅花의 염색을 雜染이라 칭하고 蘇木에 의한 木紅을 上色으로 간주할 정도로 소목의 인기가 높았다. 당시 蘇木은 궐내의 紅袍를 비롯하여 朝服, 公服 및 宗廟用의 紅○ 의장 雜裏○ 등의 제조에 펄히 사용되었으며, 또한 귀족 부녀자의 치마나 옷감의 안찝 염색에도 많이 사용되었다. 32) 이러한 紅染 의 염색을 통한 의복에서의 사치 경향은 양반층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점차 하층 민까지 확산되었다.


하지만 16세기에 들어와 端川 등 국내 銀鑛 개발과 왜은의 대량 유입에 따른 對明貿易의 활발한 진행과 함께 사치의 초점도 왜산 물품에서 中國産 물품으로의 전환이 일어났다. 이때 王室 등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사치 풍조가 점차 확산되면서,서민층들도 紗羅綾緞 등 唐物을 착용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33) 이후 사치 풍조는 더욱 확대되어 車馬 의복만이 아니라 혼인과 장례 등과 같은 일에도 사치가 심각해져 제반 物價의 등귀도 야기시켰다. 그리고 사치 풍조는 중앙 뿐만 아니라 변방지역까지 점차 확산되었다. 兩界의 각 고을에서 조차 경기도 廣州의 白器를 무역하여 그릇으로 사용하고, 음식물도 남쪽의 것을 무역하여 사용할 정도였다. 34) 


 2. 儉約策의 실시

 이러한 전 사회적인 사치 풍조의 확산 현상을 정부는 봉건적 신분 질서의 혼란을 야기시키며 농업의 황폐화와 민생과 국가재정의 부실, 그리고 물가의 등귀를 가져오는 근원으로 보고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곧 성리학적 이념과 농경을 기저로 하는왕조체제에 심각한 변질을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이것을 간과할 수없는 문제였다. 


  이에 15세기 후반경부터 정부는 사치 문제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사치 금지에대한 논의를 활발히 전개하였다. 중앙의 관료들과 지방의 수령들에게 누차 검약정을 강조하는 下敎뿐 아니라 법률적인 강제성을 갖춘 사치 금지령을 누차 발표하였다. 검약의 대상도 중앙에서 지방으로, 지배층에서 서민층으로 그리고 衣服에서雜事에 이르기까지 점차 확대시켰다.


I5세기까지는 대체로 사치의 중심이 衣服이었으며 서울?개성 등의 대도시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사치의 대상도 의복 염색과 같은 의복과 관련된 소비 증가 문제가 주요 논점이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朝-中-日 삼국무역이 본격화되면서 倭産物品 외에 紗羅綾緞등 中國産 物品이 대량 수입되면서 소비에 있어 양과 질적으로큰 변화가 발생했다. 이에 정부에서는 이전과 달리 사치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사치 금지와 검약의 측진에 대해 수없이 논의하고 금령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한 번 올라간 생활수준을 다시 떨어뜨린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법령을 통한 강제적인 방법도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특히 당시 국내의 사치 풍조 는 대중국 사무역의 활발에 따른 중국산 물품의 대량 수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에 정부는 중국으로 가는 使行이나 商人들의 銀소지를 제한하거나 금지시키는 禁銀令을 강화할 뿐 아니라 차제에 대중국 사무역을 제한하거나 영원히 정지하자는 파격적인 논의까지도 심도 있게 다루게 되었다. 35)  하지만 사무역의 이익이 워낙 막대했기 때문에 宮禁, 戚臣, 權貴 등과 같은 특권층들이 적극적으로 사무역에 참여하고 있었기에 이것을 금지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다. 실제로 1544년(中宗 39)의 聖節使, 千秋使, 冬至使 세 행차의 사신들 모두가 禁銀法을 범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특히 성절과 천추 두 使行은 엄청난 양의 銀을 싣고가 사무역하여, 중국의 主事 宋維元이 '두 使行이 銀을 많이 사용하므로 牙人들이 이익을 다투는데, 매우 해가 되는 일이다. 지난 일은 허물하지 않겠으나 국왕에게 回啓하여 禁約을 더욱 엄격히 하여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라'고 하면서 單子 2건을 주는36) 외교적인 사건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것은 당시 큰 정치적 쟁점이 되어, 세 행차의 사신들과 書狀官 그리고 點馬 등이 모두 推考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사무역을 주도한 사건의 핵심 인물은 中宮의 동생이었던 윤원형이었디?. 당시의 상황을 尹仁鏡은 '왜은이 流布된 뒤부터는 北京에 가는 通事들 중에 銀을 가지고 가지 않는 사람이 백에 한 두 명도 없으니 추국하기로 한다면 이루 다할 수 없을 것이다'고37) 토로하였다. 실제 당시의 사무역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히알 수 없지만, 당시 禁銀令에도 불구하고 使行들이 한 번에 소지해 가는 銀雨이 많게는 1만여 냥에 이르며 적어도 수천 냥을 밑돌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졌다. 이처럼使行時의 범람이 지속되자 중국에서는 우리 사신을 '朝鮮商買'라 하여 '賣胡'나 '○子와 같이 취급하거나 그들의 과거 策題에 이것을 해결할 방안을 묻는 문제가 출제 결 정 도였다. 38)


 맺음말  

 여말에 와서 재배에 성공한 면화는 우리나라의 산업발전과 서민생활 향상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특히 면포는 미단 삼베 모시 등 다른 직물에 비해서 실용성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노동생산성이 높았으므로 농가의 부업으로 급격히 정착되었다. 면포는 I5세기 후반 이래 기존의 삼베를 대신하여 국내 기간 화폐로서의 기능과 함께 이 시기 본격적으로 전개된 삼국무역에서 銀과 함께 주요한 交易 상품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면포를 매개로 한 지역간 결제통화인 왜은의 대량 유입은 국내경제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국내 유동성의 증가와 富의 증대는 생산적인 측면 보다는 사치와향락 등 비생산적인 소비문화에 투입됨으로써 이 시기 양반층을 시발로 하여 서민층까지 사치 풍조가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15세기 말부터 성리학적 이념과 농경을 바탕으로 한 왕조체제내에 생활문화 패턴의 변화가 급격히 나타났다.  의복에서 시작된 사치 풍조는 16세기에 들어와 대중국 사무역이 본격화되면서 사치의 초점도 왜산 물품에서 中國産 물품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면서 소비에 있어 양과 질적으로 큰 변화가 발생했다. 사치 풍조는 신분적으로는 지배층에서 하층민까지, 또 그 대상이 衣服, 住宅, 車馬에서 일반 雜事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었으며, 또한지역적으로는 중앙에서 변방지역까지 점차 확산되었다. 이것은 봉건적 신분질서에 혼란을 가져왔으며 특히 부업으로서 상업을 경영한 하층민들도 이 변화에 동참한것은 주목되는 일이었다.


  이러한 사치 풍조의 확산은 성리학적 이념과 농경을 기저로 하는 왕조체제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었기에 지배층으로서는 이것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에 정부는 사치 풍조에 대해 일적부터 우려를 나타내고 사치 금지령을 에 대한 논의를 활발히 전개하고, I5세기 말부터 신분에 따른 주택, 의복, 집기 등의 사용 제한 규정을 거듭 밝혔다. 하지만 한 번 올라간 생활수준을 다시 떨어뜨린다는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법령을 통한 강제적인 방법도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특히 특권층들이 부상층과 결탁하여 엄청난 이익을 가져오는 사치 무역을 주도하고 있었기에 정부의 여러 노력들도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高承濟, 「李朝綿業의 展開過程」, 「近世韓國産業史硏究』, 大東文化社, 1959

2

澤村東平, 『朝辯格作締業하生成t發展」, 朝鮮纖維協會, 1941, 7~8쪽.

3

三國史記」 권11, 景文王 9년 7월

4

고려사 권2, 혜종실록 2년

5

朴性植, 「麗未鮮初의 木綿業에 對하여」, 『大丘史學』 17, 1979

6

태조실록 권14, 太祖 7년 6월 T巳

7

大宗寶錄』 권19, 太宗 10년 4월 甲辰(8)

 8

 위은숙, 「직물수공업의 발전과 소농민경영의 성장」, 『高麗後期 農業經濟硏究』, 혜안, 1998, 227쪽   의 '綿과 다른 작물과의 노동생산성 비교 표' 참조

 9

 南美惠, 「朝鮮前期 綿業政策과 綿布의 生産」, 『國史館論叢』 104,, 1998

 10

 世宗代 이래 국가에 의한 綿花의 보급책이 적극적으로 시행되어, 평안도 함길도 등의 북방 지역    까지 木綿 種子가 보급되고 있었다. (세종실록 권69, 世宗 17년 9월 庚辰(12), 『世宗實錄』 권   71 世宗 18년 1월 壬申(6)

11

成宗實錄」 권54, 成宗 6년 4월 乙巳(27)

12

世祖責錄」 권3, 린천 2년 3월 T酉(28)

13

中宗實錄」 권17, 中宗 7년 10월 辛丑(1)

14

金容燮, 農事直說』과 『四時찬要』의 木綿耕種法 증보」,
東方學志」 57, 1988; 문중양, 「朝鮮時代   叢書에 나타난 綿栽培技術」, 『한국과학사학회지』 14-1, 1992

15

拙槁, 「조선전기의 米價變動」 「釜大史學』 17, 1993

16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新增東國輿地勝覽』 土産條를 보면 京畿道의 廣州, 水原과 慶尙道의   義城, 軍威, 江原道의 春川, 洪川, 狼川, 平安道의 宣川, 郭山, 滑原에서 木綿과 木花를 土産品으로   하고 있다

17

李景植, 「16世紀 場市의 成立과 그 基盤」 「韓國史硏究』 57, 1987;

李泰鎭, 「16세기 東아시아 경제변동과 정치 사회적 동향」 『朝鮮儒敎社會史論』, 1989. 

18

中宗實錄』 권31, 中宗 13년 1월 壬子(12)

19

宋在璇, 「16세기 綿布의 貨幣機能」, 『邊太燮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5

20

大典績錄』 「戶與」 雜令

21

I5, 16세기의 대일무역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拙稿, 「15,16세기의 對日貿易과 經濟變動」, 「釜大    定學』 22, 1998을 참조

22

金柄夏, 『李朝前期 對日貿易硏究』, 韓國硏究院, 1969, 31쪽.

23

세종실록 권34, 세조 10년 9월 정축(27).

24

澤村東平, 「返代期鮮의補作,綿業』, 未來社, 1985, 22쪽.

25

小野晃嗣, 「本邦木綿機業成立의過程」, 『日本産業發達史의硏究』, 至文堂, 1941, 331~335쪽.)

26

中村榮孝, 「三浦에 오게루爭亂」, 『日鮮關係樂史의 硏究』 上, 吉川弘文館, 1964.

27

小葉田淳, 『금은貿易史의 硏究』, 法政大출판국, 1969, 109쪽.

28

中宗責錄』 권62, 中宗 23년 8월 壬戌(23), 『中宗實鎭 권65, 中宗 24년 2월 戊子(22).

29

中宗實鐵』 권102, 中宗 39년 4월 壬辰(24).

30

실제 1538년의 은값은 1냥당 면포 4필이었는데 이후에 侵銀의 유입이 급증하면서 1542년에는 면포 0.5필로 급감하고 있다. 이처럼 불과 4년 사이에 銀價가 이전의 1/8 정도로 급락하였다. (拙槁,   앞의 논문, 1998, 「表」 15~16세기 銀의 對日貿易價의 추이 참조)

31

武部善人, 『綿本과木綿의歷史』, 1989, 45~48쪽,32)

32

金柄夏, 앞의 책, 106~108쪽

33

中宗寶錄』 권26, 中宗 11년 10월 淡辰(20),)

34

34) 『中宗實錄』 권60, 中宗 23년 2월 戊申(6)

35

中宗실록 권76, 中宗 28년 12월 戊寅(10).

36

 36) 『中宗實錄」 권102, 中宗 39년 2월 己卯(10)

34

『中宗實錄』 권102, 中宗 39년 3월 辛표(3)

 

『明宗實錄」 권9, 明宗 4년 3월 癸未(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