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베가 생활혁명을 일으켰다

장철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민속학)

불교적 이념을 지배원리로 삼았던 고려왕조의 말엽에 수입된 주자학은 우리나라의 정치경세사와 철학사상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기의 탄생을 예고하는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주자학의 지배이념을 표방하면서 조선왕조가 새로 건국되었으며 불교는 억압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영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정도의 위와 같은 상식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혁명과도 같았다. 그만큼 주자학은 당시의 사회와 생활을 뒤엎는 엄청난 힘을 몰고 왔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기독교의 전파에 의해서 우리나라가 최근세에 겪었던 격동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기독교와 함게 서구의 산업기술과 생활양식이 동시에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주자학도 농업기술과 새로운 생활양식을 동시에 들여왔기 때문이다.


농업혁명에 대한 신진사류의 관심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든다면 바로 면업과 사당제도라 하겠다. 사당제도는 바로 삶의 공간에 죽은 조상을 모시는 공간의 마련과 함께 제사를 집에서 지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생활양식을 제시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면업도 주자학과 함께 들여와 당시의 생활양식에 혁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고려말엽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신진 주자학자 들의 궁극적 목표의 하나는 일부 귀족들과 사팡에 집중되어 있는 방대한 토지 때문에 도탄에 빠진 민생을 되살리는 데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농업기술의 획기적인 변화에도 당연히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당시의 옷감이었다. 이전의 옷감으로는 명주나 삼세, 모시가 있었으나 섬유질의 강도, 내구성 또는 방한을 위해서는 비실용적이었다. 그렇다고 그것들 보다 더 좋은 무명이나 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들은 당시 원나라에서 독점적으로 고려를 비롯해서 외국에 수출했던 전략수출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목화씨는 절대로 외국에 내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다량으로 생산되어 값이 쌌던 것도 아니었다. 수공으로 조금씩 생산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값은 엄청나게 비쌌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이 무명이나 솜을 구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귀족들과 백성들 사이의 사회적 거리와 생활의 격차는 컸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진주자학자의 선두주자였던 문익점은 민생문제 해결책의 하나로서 목화의 도입을 적극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요즘의 관점에서 보아 산업스파이 역할을 스스로 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목화씨를 붓대롱 속에 숨겨서 들여온 것이다. 목화의 도입에 의해서 나타나는 변화는 내용과 차원으로 보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농경과 가사체계, 다른 하나는 일상생활, 또 다른 하나는 사회의 변화가 그것이다. 목화는 이렇게 사회와 생활전반에 걸친 변화를 초래했기 때문에 생활문화의 혁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목면제배가 가져다준 경작체계의 변화


이 혁명은 의료경작물로서 목면이 본격적으로 채택됨으로써 비롯된다. 목화의 등장으로 이전의 뽕나무와 삼 모시풀로 이어어진 경작체계에 변화가 생겼다. 특히 일정한 면적의 경작지가 확보되어야 하는 여러 해 살이인 뽕나무와 모시풀 재배가 한해살이인 삼과 목면으로 대체될 때 초래된 경작체계의 변화는 상당히 컸다.  한해살이 경작물들은 윤작이나 간작이 가능하며 또한 목화량의 필요에 따라 경작지를 넓혔다 좁혔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전의 경작체계와 본질적인 변화를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명주와 삼베, 모시 등 다른 의료 경작물이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옷감 또는 여름 옷감으로 서의 가치와 효용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사회적인 수요가 있다. 따라서 양반계층이나 도시지역부유층의 수요에 충당하기 위한 특산물로서 여전히 생산되고 있었다.  이는 무명도 마찬가지다. 현재 외국에서 다량 생산되는 목화와 기계섬유 또는 합성섬유로 인해 목화재배의 경제적 가치가 떨어졌지만 국가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특산물과 문화재의 상관관계를 이해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 혁명은 목화를 이용 일상생활에 유용한 재료를 만들어 내는 일에서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농업은 의식주를 가족단위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기 위해서 가족 모두가 농업이나 가사노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그것은 가족 모두가 농업이나 가사노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그것은 가족구성원에 의해서 식량과 옷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옷의준비는 식량 마련에 버금갈 정도로 중요했다. 그런데도 명주 삼베 모시의 섬유질이 약해 한참 바쁜 때인 여름철에도 조심스럽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목화가 도입되기 전에는 옷감이나 옷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엄청난 노동력과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 노동은 전통적으로 여성들의 몫이었기 때문에 특정한 계절에 여성들이 치려야 할 가사노등의 부담은 지나치게 과도했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고 해서 그 질이 일상생활에서 활용하기에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섬유질이 질긴 솜을 대상으로 한 노동은 비교적 손쉬웠을 뿐 아니라 특정한 계절에 구애를 받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여성은 옷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노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 농번기를 피해 짬이 날 때 옷감을 만드는 일에 종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옷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솜과 실, 그리고 옷감을 빠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솜과 실과 옷감의 활용은 옷 뿐 만이 아니라 다른 일상생활의 전반에 걸쳐 그리고 사회제도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삶의 방식제공


이 영향은 이전의 생활이나 사회를 보다 편리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삼의 방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먼저 목화의 씨를 뽑기 위해서 씨아라는 새로운 도구가 만들어 졌다. 그밖에 솜을 타는 활 실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가락과 실의 날을 고르는 날틀 등 새로운 도구들이 동시에 등장했다. 이때 무명을 짜는데 사용하는 틀은 이전부터 사용하던 베틀을 그대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됨에 따라 명주와 삼베와 모시를 짜기 위해서 사용되던 옛 도구들은 특산물로 남아 있는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외국에서 기계로 짠 광목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목화재배의 경제성이 사라지게 되자 그에 쓰이던 도구들이 쓸모없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과 마찬가지다. 이런 도구들이 지금은 민속박물관의 수집품으로 전시되어 한때의 기술수준과 그 변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솜으로는 이불과 요를 만들 수 있어 일에 지친 육체의 피로를 풀고 원기를 회복하거나 추위를 이기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서민의 민생에 기여한 목화의 효용성은 거의 절대적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이불과 요를 올려놓는 이분장이나 반닫이 같은 기구의 형태가 달라졌을 뿐 아니라 흰천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방안의 장판과 도배도 급속하게 퍼졌을 것이라는 추측도 할 수 있다.
솜의 방한기능은 옷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솜옷, 누비옷으로 발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갑옷이나 방탄복으로서도 이용되었다. 그리고 기름기를 뺀 탈지면은 흡수력이 높아 지혈이나 외과 치료용으로 쓰였으며 등과 초의 심지와 함께 화약이나 군사용 탄환의 심지로도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역사상 최고의 문화영웅


무면 실은 질기고 오래가는 내구성 때문에 일상생활에 상당히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었다. 먼저 옷을 만드는 바느질에 쓰이는 것 이외에도 노끈과 멜빵으로도 이용되었다. 따라서 빨랫줄로 사용하나 돗자리 또는 발을 엮고 책을 묶는 데에도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또한 노끈을 묶어 만든 멜빵은 물건을 담는 자루나 보자기와 함께 보부상들의 필수적인 휴대품이었다.

그뿐 아니라 실과 노끈을 이용하여 만든 낚싯줄과 그물로 어로활동에 획기적인 발달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전까지는 자연조건을 활용하던 어로가 그물이나 낚시라는 인공도구에 의해서 급속도의 발전을 꾀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강가와 갯벌 또는 바다를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생활공간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밖에 그물은 사냥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이처럼 물속에서부터 하늘까지 생활영역을 넓혀 풍부한 삶의 기술을 발달시킬 수 있었던 것은 실로 목화로부터 시작된  혁명 탓이었다. 목화의 응용성과 실용ㅅ겅은 농업이외에도 ㅇ업과 상업 그리고 사회제도에까지 그 범위를 넓혀간 것이다.
무명옷감의 실용성은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특히 방한복과 노동복으로 서의 가치는 절대적이었다. 때문에 조선시대 초기부터 한양 육주비전이 하나로서 면포전이 설립되어 무명은 중요한 상거래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 이후에 무명은 정포라고 하여 세금으로 받아들이기도 할 정도였다. 따라서 세종대왕은 그 대량생산을 위한 사회적 욕구는 엄청나게 컸다.
이러한 점은 동서양이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영국 산업혁명이 바로 기계무명(광목)의 생산에 의해서 본격화된 점을 통해서도 쉽게 짐작작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무명의 대량생산은 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모두가 갈망하던 과제의 하나였으며 무명은 꿈에 그리던 한상의 옷감이었던 셈이다 그뿐 아니라 무명조각은 수건을 비롯하여 행주나 걸레로도 활용하여 일상생활의 위생관념도 변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혁명적인 생활문화의 변화는 문익점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가치는 점점 확대되었기 때문에 세종 때에는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든 분이라는 칭호인 부민후에 봉해졌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 역사상 확실한 시기에 등장한 문화영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