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씨 도입 100년에 무명베 대중옷감으로 정착

조효숙 (경원대 의상과 교수)

 고려 말 문익점에 의한 면 종자의 유입은 우리나라 직물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으며 산업 및 경제구도 변화를 초래했다.
삼국시대 이래 방직산업은 견직업과 마직업으로 양분되어 오랜 역사를 이어왔다. 그러나 견직물은 대부분 상류층에 국한되어 사용되었으며 고려 이전에 제직되었다는 계, 백첩포 등도 외국에 공물을 보내기 위해 소량이 직조되었을 뿐 일반 서민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 서민들은 추운 겨울에도 삼베나 모시와 같은 마섬유에만 의지했다. 그러한 서민생활에서 따뜻한 솜과 무명의 원료가 되는 면 종자의 도입은 의생활의 일대 혁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후 면업은 조선왕조의 면업장려정책에 힘입어 급속히 성장 발전하여 오랜 전통을 지낸 마직업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고 견직업과 함께 조선시대 의료산업에서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문익점에 의해 유입된 면 종자는 지금이 산청지역을 중심으로 싹트기 시작했으나 당시는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기였으므로 국가로부터 적극적인 권장정책은 취해지지 않았다. 따라서 면 종자 유입 후 고려 말까지의 27년 동안 면포의 생산은 극히 소규모로 이루어졌던 시작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왕조 들어 적극화한 면업 장려정책


조선왕조로 접어드는 태조 원년(1392)부터 태종 말(1418)까지의 27년은 면포가 대중의 보편적 의료로 정착되는 시기다. 국가에서도 면포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면업을 장려하면서 목면 종자의 도입자인 문익점의 공덕을 높이 평가하여 파격적으로 우대했다. 먼저 문익점이 죽은 이듬해인 태조7년(1399)에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참지의정부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강성군으로 증직했다. 또 태종 10년(1410) 사간원이 올린 시무8조 중 위로는 경사에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 까지 상의하상(上衣下裳)의 옷의 원료로 쓰이는 무명을 보급한 문익점의 공로를 다시금 높게 평가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전을 지급하자는 건의가 나오기까지 했다. 이화 같이 문익점이 공로에 대한 뒤늦은 표창은 그 당시 비로소 목면이 널리 재배되기 시작하여 국민생활에 편리를 도모하고 국가에 많은 이익을 주었기 때문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으며 아울러 면업을 장려하려는 국가정책을 반영했다고 하겠다.
태종대의 더욱 적극적인 목면권장정책을 보여주는 예로는 동왕9년(1409)에 경상도 경차관(敬差官) 한옹이 올린 조목을 들 수 있다. 그는 면포전에 대하여 쌀로 납세하는 것을 면제해 줄 것을 주청했으며 태종은 그와 같은 특혜조치를 허락했다.
이와 같은 국가의 권면정책이 촉진제 역할을 하여 면화재배는 서서히 정착되어갔다. 그러나 아직 면포의 생산은 충분하지 못했고 태종17(1417)까지도 명과의 교역에서 말을 수출하는 대가로 여전히 많은 양의 면포가 수입되었다.
세종대가 되어 이제 면업은 정착기가 지나고 발전기에 접어든다. 세종7(1425)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경상도의 109개 군 현 중에 88곳에서 전세(田稅)로서 면포를 납부했고 83곳에서 목화를 납부했을 정도로 15세기 초기에 경상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목화와 면포가 생산되었다.
그 후 7년 뒤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토의목면(土宜木棉)이라 기록된 면의 산지명은 경상도 뿐만 아니라 남한 전역에 급격히 확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남지방에서 토착화에 성공한 세종은 면화 재배를 기후 풍토가 잘 맞지 않는 서북지방에 까지 보급시키고자 노력했다. 세종17년(1435) 함길도는 기후가 남방과 달라 한전(旱田)을 경작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하삼도(충청,전라,경상)에서 면종자를 거두어 함길도에서 면화를 키우도록 했다. 다음해 역시 함길도 감사에게 목면종자를 보내어 재배법을 시달하고 먼저 관가에서 시범을 보여 일반 농민에게 알리도록 지시하는 등 북방지역의 목면재배를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그러나 기후가 한랭한 북방지역에 면업을 확산시킨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왕 28년(1446)에는 평안 함길도 관찰사에게 목면 경작을 장려했고 평안 함길도내에 거주하고 있는 하삼도인으로 하여금 목면을 경장하게 하고 차츰 원주민들도 면업을 보급 시키도록 하는 등 국가의 계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성종대에도 계속되었는데 동왕6년(1475) 영안(永安) 평안 황해 삼도에 목면 종자를 나누어 보내고 백성들로 하여금 힘써 경작해 삼도에 목면 종자를 나누어 보내고 백성들로 하여금 힘써 경작토록 함으로써 북방지역의 목면 보급을 위해 일관된 국가정책을 폈던 것이다.
중종 25년(1530)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목화의 특산지로 경기도 경상도 강원도 평안도가 기록되어 재배가 평안도까지 확산된 것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하여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면작은 함경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이루어지게 되었고 막대한 양의 면포가 일본, 유구 등지로 수출되었다.

삼남에선 면포가 대표적 토산공물로 책정돼 면업의 급속한 성장과 발전은 산업경제 구조의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첫째, 계속되는 면업의 확산으로 의료산업의 재배치가 이루어졌다. 삼남지방 일대에서 오랜 전통을 이어온 마직업은 면화재배가 어려운 서북부 지방으로 옮겨지고 면포가보편적인 의료로 정착되었다.
예종 원년(1469) 6월에 공조판서인 양성지는 공물을 지역적으로 배정할 떼에 각 지방의 토산에 따라 하삼도에서는 면포 평안 황해도에서는 명주 함길,강원도에서는 마포, 충청도 임천, 한산에서는 저포를 납부하게 하자고 청했다.
경상,잔라,충청도 등지에서 면호를 대표적인 토산공물로 책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야 말로 예종 원년께에 이르러 면포가 남한 일대에 있어서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의료로 정착되었음을 알리는 지표로 볼 수 있다. 16세기에 저술된 동국여지승람 에 의하면 평안도에서 42개 군현 가운데 39곳이 함경도에서는 22개 군현이 전부 그리고 황해도에서도 24개 군현들 가운데 14곳에서 마포가 생산되었던 점은 마포 산지의 이동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후에도 1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면화 재배는 계속 증가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서유구는 임원십육지에서 당시 전국에서 생산되고 있는 면직물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관서에서 생산된 면포는 가볍고 고우나 약간 약하고 영호남지방산은 질기고 견고하나 투박하며 경기지방에서 나는 것은 고양 송도에 나는 것을 가장 높이 친다 둘째 면포가 조선대 의생활에서 가장 보편적인 직물로 사용되었다 면포는 견직물처럼 아름답지는 못하나 실용적이었다. 저마다가 하복재료로서, 견직물은 동복재료로 적합한데 반하여 면직물은 사계절 통용할 수 있는 의료였다. 그 외 흡습성이나 보온성이 뛰어나 내의, 버선, 침구까지도 주로 면직물이 사용되었으니 면포의 국내수요는 실로 막대했다.
면포가 의료로 사용되었던 실례로서 태종10년에 위로는 경사에서 아래로는 서인에 이르기까지 상의하상의 의료로 면포를 보급한 공로를 높이 기리어... 라고 한 것을 들 수 있거니와 이것은 당시 의생활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그러나 태종대까지는 목면이 상류계층의 의료로 쓰인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단지 여진의 사신들에게 몇차례에 걸쳐 목면옷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태종16년(1416)에는 석자의 연을 두를 때 잠실의 공력이 매우 어려우니 이제부터 목면으로 대신하고 각전의 자리에 두르는 연도 비단을 쓰지 말고 압두록색 칠승목면을 사용하며, 동왕 18년(1418)에는 예조에서 혼인하는 사람의 금침을 토산인 주(紬;명주)와 면포로 하라는 사의(事宜)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서민들의 경우 이미 목면을 의료로 사용했으나 상류층에서는 의복보다 침구와 같은 생활용품부터 목면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세종대에 들어서면서 면포는 상류증 의복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세종 27(1445)에는 6명의 승지에게 압두록 면포와 홍주(紅紬)를 한필씩 하사하여 중국 체의의 의복을 만들어 입도록 했다. 다음해는 집현전으로 하여금 복색상정조건을 의논하게 했는데, 제1조에 공(工) 상(商) 천예(賤隸) 향리(鄕吏)는 목면 면주 저포를 8승이하를 쓰도록 명시한 점으로 미루어 일반 서민들에게 목면이 일반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8승 이상의 고운 목면도 많이 통용되엇기 때문에 이와같은 규정이 설정되었을 것이다.
또한 단종대에는 명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온 중국 사신들과 그 당시 최상의 권위를 가졌던 수양대군에게도 면포로 만든 각종포류(布類)를 하사한 점으로 보아 면포는 이제 관리나 왕족의 의료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1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면포는 왕족으로부터 천예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인 의료로서 자리 잡았다고 하겠다.
현존하는 복식 유물 중에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대의 출토품에 무명옷이 많이 보이며 특히 임란중에 사망한 사람의 유물은 거의 무명으로 되어있다. 예를 들면 임란 중에 전사한 김덕령장군의 복식이나 김함의 복식 등에는 속옷은 물론 겉옷인 포류도 무명이 대부분이다.
이는 임란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비단옷이 퇴조하고 실용적인 무명옷이 더욱 확산된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셋재 면포는 외국무역 및 국내시장에서 중요한 거리물로서의 위치를 차지했다. 즉 면포는 세종이후 성종 중중에 이르기까지 명 여진 일본 등으로부터 필요한 물자를 수입한 것에 대한 지불을 충당했고 특히 대일무역에서 면포의 수출량은 막대했다. 그리하여 조선조 대외교육에 있어서 지불수단의 주중을 이루는 대표적인 수출품목으로 자리를 굳혔다.
또한 세종 이후 국내 유통경제에서 마포를 대신하여 화폐의 역할을 했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는 시장을 기점으로 유통이 일정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19세기 초에는 쌀을 거래하고 있는 군현의 수가 253곳이었는데 비해 면포가 거래되는 곳은 258곳으로 더 많았으며, 명주는 73곳 저마포는  175곳으로 이에 훨씬 못미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농촌 수공업으로 발전한 면업은 염업, 광업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기간산업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