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목면전래와 경제구조의 변화

박화진 교수(부경대) 2003년 5월 30일 발표


목면이란/ 세계목면의길/ 일본의 목면전래 이전의 서민의복/

목면관련 최초기록

일본의 조선목면 수입

일본의 목면보급과 재배에서 농서와 목면

전국적 재배양상

목면의용도

목면업재배기술 

목면의 영향

경제 구조변화


목면이란 ? 


목면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크게 나누면 海島木綿, 이집트 목면, 陸地목면, 아시아목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면모의 길이 ,강도 ,색상 ,숙성도 ,균일함, 섬유의 섬도 등에 따라 그 품질이 나뉘는데, 기계방직에는 섬유가 길고 가는 것이 좋은데 , 면모의 길이는 해도목면이 가장 길고(3.81~5.08cm) 아시아목면이 가장 짧다(0.95 ~ 1 91cm)고 한다.


  일반적으로 면모의 용도는 ①의복(방적)의 원료, ②이불숨 ③화약 및 셀를로이드 원료 등이고 특히 목면이 의복의 원료로서 상용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특징 때문인 것 같다. 실의 강도가 강하여 방적하기 쉽고 탄력성과 신축성이 뛰어나 촉감이 좋으며 색감과 광택이 좋으며 염색하기 쉬우며, 나아가 섬유 사이가 中空인 까밝에 중량이 가벼우면서도 보온력이 매우 우수하며 흡수성이 매우 뛰어난 점등을들 수 있다.


  그리고 목면 종자는 약 20% 정도의 유지분을 포함하고 있어 씨를 짜서 식용유(사라다 오일 등등)를 만들기도 하고, 그 찌꺼기는 매우 우수한 유기질비료로서도 중보되었으며 또 목면을 따고 난 뒤의 고목은 연료로서도 매우 소중하게 사용되어 그 용도는 한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목면의 전래는 의복혁명을 일으키고, 나아가 서양과 일본의 역사를 바꾸어 버리는 제1차 산업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실크로드'와 '코튼 로드(목면의 길)'


서민들의 의복생활에 커다란 변화와 혁명을 가져온 목면의 기원과 그 전래과정에 대하여 살펴보면, 현재 고고학적 발굴조사 결과에 의하면 구대륙에서는 인도가 이미 약 5,000 여년 이전 중국이 약 3,500년 이전 목면이 재배되었다고 본다. 한편 조선의 재배기원이 640여 년 전이라고 보는 견해는 너무 늦은 것 같은 감이 있다. 아마 추후의 연구 성과에 의해 수정될 것이라고 유추하는 바이다.


(1) 재배식물의 起源』


목면은 세계 각지에서 각각 별개의 기본종자로부터 독자적으로 재배된 것 같다.인도에서는 '기다치와다'가 가장 오래된 목면종자이었다. 인더스강 하류의  모헨죠다로 유적(기원전 26세기)에서 綿布조각이 발견되고 있으며 인도 最古의 문헌인 리그베다(B.C 1300~1000)에도 기록이 전하고 있다. 아라비아에서는 시로바나와타가 인도에 이어 고대부터 재배되고 있으며 이후 유럽에도 점차 전해졌으며, 그리고 종래의 아시아계통 목면들이 대부분 아메리카대륙으로부터의 육지목면으로 호환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아마를 의복으로 하고 있었던 탓 때문인가 목면재배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13~14세기에 이르러 비로서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이집트목면은 주로 19세기에 이르러 유입된 페루목먼이라고 한다. 

신대륙에서는 페루를 중심으로 기원전 26세기부터 페루목면, 브라질에서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브라질 목면이 재배되었으며, 멕시코에서는 이미 기원전 5800년에 육지목면이 재배되었다고 한다. 미국으로는 1704년에 처음으로 버지니아 지역으로 유입되어 마침내 주로 육지목면을 중심으로 재배되었다. 중국에서는 10세기이후 인도로부터 종자가 유입되어 12세기부터 본격화하게 되었다.


(2) 「세계면업의 발달」

세계면업발전사』 ,일본방적협회,-村山高- 인류가 목면 꽃으로부터 면사를 만들어 면직물로 짜 의복으로 만들어 입게 된 것은‥‥적어도 약 오천년 전의 인도에까지 소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인더스강 유역 모헨죠다로와 하랏빠 양 지역에서 ‥‥‥ 고대 도시유적이 발굴되었다 이 유적은 인더스 고대도시문명의 존재를 실증하는 것인데 면직물의 파편 및 면화를 잣는 방추차가 발견되었으므로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목면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공예작물학』


목면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전부터 사용되어 왔는데‥‥‥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기록한 것에도 이미 목면관련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목면은 회교도들에 의해 유럽에 소개되었으며 영어의 Cotton(코튼)이라는 단어는 아라비어어의 qutum 및kutum에서 왔다고 한다. 중국의 목면재배는 태고에 인도로부터 불교와 동시에 전래되었다는 설과 그 이전이라는 설의 두 가지가 있는데 현재 확실치 않다.

조선에 목면이 유입된 것은 고려말(1363년 무렵?), 원나라로 사신 갔던 문익점이 목면종자를 가지고 들어옴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2. 일본의 목면전래 


(1)목면이전의 시대

목면 전래이전의 서민의복-추위와의 싸움


목면이 외국으로부터 들어오기 이전 일본의 고대,중세 서민들의 의복생활은 모시와 삼베를 중심으로 한 麻의 재배 ,방적 ,직포의 시대였다. 그것은 오랫동안 각 개인의 농가에서 본인들 자신의 필요한 직물을 마련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시행되어 왔다. 따라서 일반 농가의 여성들은 매우 손이 많이 가면서 또 능률적으로 그다지 효능이 좋지 못했던 이러한 마의 베짜기 노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뒷날의 목면시대와 비교해볼 때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편 이런 힘든 의복생활에 대대적인 혁신을 가져오게 된 목면은 언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단계로 나누어 등장하였다.

첫 번째 단계는 중국이나 조선에서부터 목면제품이 완전한 수입품으로서 전해진 시기와

두 번째 단계는 일본국내에서 목면의 재배, 방적 ,직포가 직접 시행하게 된시기의 두 단계이다.


 우선 면면 관련 기록이 일본 문헌상에 언제부터 나타났던가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하겠다. 문헌상의 자료가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정확하게 대답하기어려운 점도 있으나, 戰前 일찍이 철저한 사료조사를 통하여 목면에 대한 개척적 연구를 해왔던 오노 고우시(小野晃嗣)1)에 의하면 元久1(1204)년 무렵 송나라 상인이 일본에 목면포를 가져온 것으로서 당시 일본에는 없던 물건이었다는 기록을동하여 가마쿠라 시대초기에 이미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2)

그러나 아직 심유 관련 유물들에 대한 자연과학적 분석,검증이 되지 않고 있으므로 어디까지나 가설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正平12(1357)년 10월 17일, 室覺寺의 無隱元○가 히다치 호운지(常陸 法雲寺)의 후암 종기(後○宗己)에게 보낸 편지 속에 "木綿方(○)一領 聯表微志" 라고 기록하고 있어 아마도 禪僧들 사이에 중국의 원나라로부터 수입된 목면의 ○衣가 매우 귀중품으로서 취급되고 있었음을 추측되고 있으며, 또 남북조 시대에 작성된 『庭訓往來微 속에서도 '綾紫小抽','上品細美','單 之絹'등의 의료와 나란히 木綿이라는 단어가 나타나고 있다.


  I5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점차 목면의 사용실례에 대한 기록이 증가하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목면은 중국 ,조선으로부터 수입된 박래품으로서 아직도 귀족사회에 한정된 매우 고귀한 물품이었다. 아직 일본 국내에서의 목면재배가 시작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滿濟○后日記 永享4(1432)년 5월 8일조 등등 ‥‥)

(2) 조선목면의 일본전래*조선의 목면 전래


  일본에서 아직 목면 재배가 되지 않았을 때, 이미 조선에서는 목면 재배가 시작되어 매우 활발하게 보급되고 있었다. 조선도 원래는 모시와 삼베의 나라로서, 고려시대말기까지는 麻布가 물건매매의 교환수단으로서 화폐대신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나 14세기 후반 고려 말 공민왕13년(1352~74년 재위) 무렵, 원나라에 갔던 사신(문익점)이 귀국하면서 목면씨를 가져온 것을 계기로 약 10년동안에 한반도 전역에 널리 전파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송나라시대 말기 무렵부터 목면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


  그리하여 1392년 조선왕조가 성립하였을 무렵부터 한반도에서 목면제배가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것 같다. ( 기상적 조건으로 인하여 한반도 북부는 목면재배가 불가능하였던 것 같으나 한반도 남반부를 중심으로 목면재배가 확대되어 의복생활에 있어 모시와 삼베를 대신하기에 이르했던 것 같다. )

이에 일본에서는 쥬고쿠(中國) ,규슈(九州)지방의 守護大名 및 유력한 國人영주들을 중심으로 잇달아 사신들을 한반도로 파견하여 무역을 요구하였다. 당시 조선왕조는 일본국왕(=무로마치막부 쇼군) 혼자뿐만이 아니라 사신을 보내오는 大名 , 國人들과의 무역도 그대로 수용하는 외교방침이었던 것 같다. 이에 일본측 사절단이 비교적 빈번하게 자주 왕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使送船, 興利船은 일본의 토산품과 남방(서양) 수입품을 싣고 갔으며, 그 대신에 조선왕조로부터 다양한 많은 하사품을 받았는데, 초기엔 모시,삼베 등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應永13(1406)년 일본국왕의 사신에 들려보낸 하사품 중에 종래의 모시, 삼베 이외에 '靑木綿'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그 2년뒤인 오우치(大內)씨가 보낸 사신에 대해서도 '綿布'4)가 하사되고 있다. 이것은, 오우치씨가 수오우, 나카도를 중심으로 한 유력한 수호대명일 뿐만 아니라 일찍이 왜구문제 및 무역문제 등에 있어서도 정치적, 군사적으로 매우 증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 등에서 쇼군 사신단과 비견될만한 특별대우를 하여 목면을 하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다른 대명, 국인에 대한 하사품 중에는 귀중품이었던 목면은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초기 태조 ,정종 ,태종임금(1392~1418년)시대에는 여전히 삼베와 모시가 중심이었으나 그 이후 급속히 목면재배가 확대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應永25(1418)년부터 동 30(1423)년의 5년 동안 사이에 조선왕조의 일본 사절단에 대한 하사품 중에 목면가 주류를 이루고 그 뒤를 이어 삼베와 모시가 차지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종전의 귀중품이었던 목면의 재배가 급속히 확산되었다는 점과 일본측의 목면에 대한 수요급증에 의하였던 것 같다.  예를 들면 ○德3(1451)년 ○○日三州太守源貴久(島津)이 문종의 즉위를 축하하여 사신을 보내어 많은 선물을 보내었는데 그에 대한 조선왕조의 하사품이 "綿布 2,394匹"이었던 것으로 보아 일본 측의 희망이 면포로 집약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李朝責錄』 世祖 成化3(1467)년 8월 己亥조 기사 "司○ 濟用兩司所○ 綿布則二十余万○ 綿○只二千余○는 한반도에서의 목면생산의 급증과 더불어 이에 국고비축도 목면을 중심으로 하게 되었음을 읽을 수 있다


한편 조선목면 성능의 우수함을 알게 되자, 일본에서의 목면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때마침 오닌의 난을 비롯하여 시작된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목면은 병사들의 의복을 비롯하여 제반 군사적용에 더 할나위 없이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文明2(1470)년, 日本國因伯丹三州太守山名少弼敎豊도 사절을 조선으로 보내어 호키(伯○) 万福寺 수축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大般若經一部,子一○ , 木綿三千○ 人參五百斤, 八木五百石,? 大○二○)를 요구했으며 , 文明5(1473)년에는 "일본국 防長攝泉四州太守大內別駕多多良政弘"이 淸水寺 再建料로서 (銅錢 ,綿○,綿布)등을 요구하여 (정포 일천필 ,면포 일천필 ,玄米 500碩)을 얻어갔다.


  이 무렵부터 大名 및 國人領主들의 대조선무역 형태가 동, 철을 조선으로 수출하고 그 댓가로 綿布를 얻기를 희망하는 형태로 일반화 되어 갔다. 그리하여 文明7(1475)년에는 京왜관무역과 경상도 浦所무역으로 지급되어 간 면포의 숫자가 모두 27,800필, 이듬해 文明8(1476)년에는 37,421필이라는 급증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사태가 일어나자 조선정부는 점차 위기감을 느껴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일본이 조선왕조에 가져다준 것은 대체로 사치품이 많았으므로 이것을 목면으로 교환하는 비을을 변경하여 종전의 황금1량=면포 30필의 비율을 고쳐 1량=25필이라는 식으로 목면의 가치를 높이고, 회사품의 하사시에도 正布, 綿주 , 목면의 세 가지로 주는 방식을 취하여 목면 국외유출을 억제하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延德2(1490)년 대마도의 宗貞國이 조선왕조에 대하여 일본 측은 오로지 목면으로만 받고자함을 밝히기도 했다.


이에 조선정부는 곤혹하여 공적무역에 제한을 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마도 및 기타규슈, 산인(山陰)지방과 조선정부는 원래 작은 배로서 왕래할 수 있는 정도였으므로 쌍방의 민간상인 간의 거래까지도 포함한다면 분명히 급증한 일본측의 요구가 한반도에 있어서의 내수분까지도 위협할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조선왕조가 목면의 대일수출에 대하여 제한을 가하기 시작한 I5세기말부터 16세기에 걸쳐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唐木純)을 수입하려는 동향이 나타나기 도 하였다


<에도시대이전의 목면作, 木綿織의 전개상황>


  일본국내에서도 목면재배에 대하여 전전, 탁월한 연구를 한 오노 (小野晃嗣)는관계사료를 널리 섭렵한 위에 말하기를, "草綿花는 조선으로부터 수입된 것이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機業중심이 구주방면에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동쪽지방에 편재하여 있음을 상기할 때 웬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라고 자문하고. 나아가 "거기에는 반드시 그렇게 될 필연적인 이유가 숨어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또 규슈방면 지역에서는 활발한 해외교통에 의하여 조선 혹은 중국으로부터 양질의 목면포가 대량으로 수입되고 있었다 이 양질의 수입목면에 압도되어 구주방면에서의 機業화의 발전이 동국지방보다 늦어졌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를 든다"고 자답하기도 하였다.


  오노씨는 일본국내의 목면재배가 미카와로부터 시작하여 동쪽 지역으로 확대전개되었으며 서국(서쪽)방면은 뒤에까지 우량품질이었던 唐의 목면에 의존하여 일본자체 국내목면의 생산은 늦었었다라는 기본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오노씨의 '일본의 목면재배가 서국에서는 미개하고 동국을 중심으로 田개하였다'는인식은 다소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오노씨는 본인(나가하라)이 규슈지역에 대하여 제시한 전○親種의 史料. 加薦淸政의史料. 全國初見 ○田莊등의 사료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일본 국내에서의 목면재배는 규슈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그것은 일찍이 벼농사(稻作)가 기타규슈(北九州)로부터 시작되어 점차 동쪽지방으로 전파되어간 것과 거의 같은 발자취를 따랐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거의 동시적으로 각지에서 병행하여 종자가 전파되고 이곳 저곳에서 면작이 시행되어지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이때 호쿠리쿠(北陸), 도호쿠(東北)방면이 다소늦은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로서 국내목면 재배의 개시와 확대를 에도시대 전기 중심으로 보는 견해는 정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그보다도 빠른 시기,즉 16세기 중엽무렵 전개된 정도를 크게 평가하여만 할 것이다.


  3. 일본의 목면보급과 재배

(1) 농서와 목면

목면재배 기술 및 경영형태를 알려주는 사료는 에도시대 이전의 것은 현재 발굴되지 않았다고 한다

일반인들에게 목면재배에 대해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료로서는다음의 농서 『淸良記, 百姓傳記』 , 『農業全書』 , 『綿圃要務(大藏永常) 등을 들 수 있다.


  『淸良記』 (제7권 「親民鑑月集)는 잔존하는 일본 最古의 농서로서 그 성립연대는 에도시대 초기로 전반적으로 전국시대말~근세초기의 농업기술을 반영하고 있다. 5)


여기서의 목면재배는 오로지 밭작물로서 3월의 파종, 양토, 사토, 점토질의 밭이좋고 비료와 중경제초작업을 많이 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6) 

백성전기 7)에서는 딘작 재배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토양은 모래, 작은 돌이 섞인 땅을 좋다고 하며 종자를 잘 선택할 것과 비료로서는 호시카(말린 멸치)가 좋으며 용수작업에 대한 주의를 촉구하고 있어8) 기내 지역에있어서의 면작보급을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일본 농서의 집대성이라 일컬어지는 『農業全書』 의 경우 목면재배에 대한 기술이 가장 상세하게 언급되고 있다9). 稻作(3년)과 면작(2년)의 輪作재배법을비롯하여 파종량과 시비법, 용수, 제초등에 이르는 다비 다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면포요무 (大藏永常)는 에도후기의 농서로서 특히 목면재배기술에 대한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단계의 목면 재배기술은 수전에 이랑을 만들어 심는 半田기술이 유행하게 되는데 ‥‥‥‥


 (2) 전국적 재배 양상


일본인들이 목면을 알고 그 매력에 이끌리기 시작한 것은 14세기말부터 I5세기 이 걸쳐서였다.

그 이후 일본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목면을 손에 놓고자 갖는 노력을 하였다. 일본 측의 너무 갑작스런 목면의 수입 증가에 당황한 조선 측은 이를 견제하기 시작하자, 일본은 중국의 당목면을 사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무역방침이 조공무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금지한다는 海禁정책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밀무역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당초 외국의 목면수입에 의존해오던 길이 끊기게 되는 오닌의 난(1470~1480년) 전후부터 일본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목면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할 수 있는 사료들이 출현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엄격한 의미에서의 일본국내 목면재배 관련 기사로서 최초라고 단정하기는 어렵겠지만 문명11(1479)년의 지쿠젠쿠니 가유타노쇼 나츠쇼등연서료족주문(○前國○田莊 納所等連署料足注文) 10)

『金剛三味院文書』 -211호- 속의 "木綿壹端令賢房에進之"라는 기술을 들 수 있다. 가유타쇼(○田莊)라 불리우는 장원은 하카다 동쪽편에 있는 장원으로서 그곳의 장관이었던 나트쇼의 공문들로부터 령현방(?),이라는 인물에게 목면 일 단이 진상되었다는 것이다. 가유타 장원은 高野山글갔 삼미원의 영지로서 이 문서도 이 금강삼매원에 전래되어 오고 있었으므로 아육포 링현방도 이 곳에 거주하였던 스님이었으리라. 여기서 料足의 청산과 관련된 기술에 이어서 (送進上之土産事)라 하여 華屋釜등에 이어서 이 목면이 거론되어 있다. 즉 목면 일단을 일부러 멀리 있는 규슈지역에서 부터 보낸다는 사실은 당시의 설정상 아직도 일본 국산 목면이 그다지 일반화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것일 터이다. 土産이라 기록하고 있으므로 지방의 향토 토산물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당치 수입품으로서 매우 귀중하게 여겨지고 있던 목면이 가유타 장원이나 혹은 그 주변에서 산출되었으므로 그 고장의 자랑하는 토산품으로서 령현방에게 보내어졌던것을 아니었을까 이 사료만으로 이렇게 단정하기에는 다소 불안함이 남지만 .나가하라게이지는 초견사료로 보고 싶어한다? '이어서 『山科家札記』라는 일기의長草2(1488)년 9월 1일자와 明○1(1492)년 8월 3일자의 기술에서 목면을 의미하는 '기와타와 와타를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이래로 면(綿)이라는 글자는 모두 노에고치실로 만든 眞綿을의미하여 왔으므로 이와 그별하기 위하여 '기와타'라고 히라가나로 기술한 것 같다. 그리고 '와타노 아후라는 목면 종자를 짜서 만든 綿實油이다. 이 면실유는 식용인 것 같으나, 나무통七十'이라는 숫자는 너무 많은 것 같으므로 다소 의문이 있다.


어쨌던 에도시대에는 야마토 ,셋츠 가와치 ,이즈미 지역이 기술적, 생산적으로도 가장 우수한 고도의 대표적 면작지대였다. 이리하여 서쪽은 구주로부터 동쪽은 관동지역에 이르기까지 아마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에도시대 이전부터 목면재배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그러나 역시 동북지방으로의 전개는 아직 안되었던것 같다.


                    4. 목면업 전개 양상

(1) 목면의 용도


16세기 일본국내에서의 목면생산의 보급, 전개에는 이를 촉진하는 강한 수요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麻에서 木綿으로라 하면 서민 의복의 재료가 마에서부터 목면으로 전환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서민 복식 측면에서만 고찰하기엔 편협한 감이 적지 않다


전국시대 급속하게 목면생산이 발전하게 되는 원인에는 당연히 그 시대 특유의조건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 야나기다 쿠니오(柳田國男)의 논문 「木綿以前의事」 는 그의 관점 (常民의 생활) 문제로서 논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그것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는 목면 등장이 몰고 온 이루 다 헤아릴 수없을 정도로 깊은 영향과 의미에 대해 살펴볼 때 그 용도의 다양성 측면에서 16세기에 있어서의 구체적 조건, 특수성에 입각하여 추적해야만 할 것이다.


 군복으로서의 목면

.*군복으로서의 목면----그림이 철요


문명2(1470) 무로마치 막부의 재정을 맏았던 만도코로의 집사 이세마사치가는 조선으로 사신을 보내어 목면을 요청했으며,

 이어서 文明5(1473)년 오우미(近江) 이즈모(出雲)의 수호 교코쿠 마사즈네가 자신의 영지인 오우미, 이즈모지역이 오우닌의 난에 휘말려 전쟁터로 바뀌어 인민들이 군인으로 동원되어 농토가 황폐화되어 사람들이 조악한 갈포 종류 정도만 겨우 걸치게 되었다. 이에 병사들은 추위를 이기지 못하여 동상에 걸려 손가락을 잃어버릴 정도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는 내용으로서 매우 다급하게 귀국의 면주 및 목면을 보내주었으면 고맙겠다는 청원편지이다. '臣之蔽邑'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왕조에 대하여 신하로서의 예의를 취하는 문장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에서도 그의 절박한 상황을 읽을 수 있다.펀지에서 목면의 사음용도가 군복임을 명확히 알려주는 최초의 사료라고 말할 수있 을 것 이 다


진막, 식진 우직 마의 등의 용도

 군복, 무사 복장과 더불어 군용 목면으로서는 깃발, 노보리(○) ?진막(陣幕), ,?陣羽織 馬衣등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일반적인 시위효과를 가진 것이기도 하지만, 적과 아군을 구별하거나 지휘관의 소재 등을 알려주는 등등. 전쟁시에는 빠뜨릴 수 없는 표식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색채의 선명함이 요구되었다 이 점은 야나기다 쿠니오씨가 지적한 바 있으며 마포의 경우 염색이 선명한 색감을 얻을 수 없는 데에 대하여 목면은 원하는 색깔이그대로 선명하게 낼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진막 및 노보리등에도 목면은 적격이었던 것이었다. 이와같이 목면의 초기용도는 서민들의 의복으로서보다는 군수품으로서 주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 화승총


  목면이 직접적인 군수물자로서의 성격을 띤 대표적인 예로서 種子島銃의 화승을 들 수 있다 火繩銃이란 銃身의 측면에 철확(절구)모양의 구멍(구덩이)을 가진 화약통을 붙여 바닥의 불구멍이 총구멍으로 연결되도록 만들어져 있었으며, 또 화약통에는 화약두껑이 덮이도록 되어 있었다. 사격시에는 총구로부터 검은 색 화약을 총신의 바닥까지 채워 탄환을 장착하고 화약통에도 약간의 화약을 넣어 화승의 힘을 빌려 화약이 점화되어 총구 부분의 화약을 폭발시켜 발사하게 하는 것이다


  화승이란 종자도총 그 자체는 아니지만 화승이 끄져 있으면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이다. 한편 화승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드디어 결전에이르러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점화하기 쉼고 또 다소 버틸 수 있으며 간단히끄져버리지 않는 그런 것이라야만 되었다 특히 전쟁 중에는 화승총의 불이 염천의 더운 날씨에는 너무 빨리 타 소진하지 않도록 우천시에는 화승의 불이 잘 붙지않거나 또는 끄지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였다. 이 화승총의 화승이 처음에는 대나무 소재였으나 차차 내수성이 강한 목면제품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 같다13). 따라서 전국시대 말기에 이미 목면으로 된 화승총이 중보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 범선의 범포(돛)


  목면의 용도 중에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 帆布이다 전국시대라는 전쟁 을 수행하면서 얼마나 빨리 대량의 물건을 신속하게 운반하는 여부는 그 승 패를 판가름하는 중대사였던 것이다 이 속도의 증가에 가장 중요한 일익을 맡은 것이 바로 목면으로 만든 돛이였다.


  慶長16(1611)년 모우리 쇼즈이(毛利宗瑞=毛利輝元) 사다메가키(定書)에 "빠른 선박은 목면돛으로 갈색 무지이다"14)라는 표현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기존의 짚으 로 만든 돛과 왕골 대으로 만든 돛과 비교하여 목면 돛으로 된 선박 쪽이 속도가 빠른 것은 목면이 바닷바람을 잘 품어 달리기 쉽고 비나 바닷물에 젖어도 다른 소 재의 돛에 비하여 빨리 마른다는 점 또 조작하기 쉽다는 등의 여러 가지 점을 들 수 있다. 아무튼 목면 돛의 등장은 전국시대라는 시대적 성격상 커다란 의미를 가 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무로마치(室野) 중기이후 발달 전개된 선박의 대형화가 목면돛에 대한 수요를 더욱더 급증시키게 되었다. 즉 무로마치 ,전국시대는 상품유통이 활발하여짐 과 동시에 지방에서 도시로라는 구심적 물류유통 뿐만이 아니라 각 치방 상호간의 물자이동도 활발하게 되었다. 각 지방을 근거로 성장한 전국대명들은 군수물자 확보라는 전략상의 이유에서도 어용상인들을 고용하여 대량수송에 주력하였으므로 더 욱더 선박의 대형화가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목면돛에 대한 수요가 바로 목면 수요를 더욱 부추겼다

  

*민중의복으로서의 목면-서민의복생활 혁신


 (2) 목면업 재배기술


  *다비료, 다노동의 목면 재배로 생산량의 증가하여 직포기술의 발달고 염색기술의 발달을 유발함


  *사라시 기술


(3) 목면의 영향-서민생활을 바꾸다


농후한 상품 농작물적 성격


한편 목면의 경우 삼베와는 달리 일찍부터 상품적 성격이 농후하였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마의 경우, 고대에서는 自家소비분을 제외하고 유통시장에 방출된 것은 일단 용,調로서 국가로 취합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중세에서도 年貢이나 在家役 등과 같은 장원제적 취합이라는 형태로 변화하기는 하였으나 생산자 농민의 손으로부터 근소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직접 지방시장으로 방출되는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가마쿠라시대 후기 무렵부터이었다. 

무로마치 전국시대로 들어서면 중앙지역의 나라사라시(奈良○) 같은 기술적 발전을 바탕으로 중앙상인들이 에치고(越後) 등 특정 모시와 삼베 생산지로부터 靑苧라는 중간 상품형태로서 다량으로 사들인다는 형태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 유통량은 후일의 목면과 비교한다면 아직 소량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저마의 방적, 직포생산능률의 비효을성이 대량생산을 불가능하게 하였으며, 농촌에서는 전국적으로 自家用 생산이 되고 있었으므로 점차 발달하기 시작한 도시를 포함하더라도 상품시장은 대체로 협소하였던 덕이다.


  그러나 목면의 경우, 상품 유통적 성격을 농후하게 띄고 있었다. 우선 목면 직물이 조세로서 직접현물 형태로서 지배층의 손에 수합되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목면은 각大名등의 상품으로서 영내외로 유통되었으며 이에 대해 대명들은 목면의 역이라는 형태로 役錢을 부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는 영내 경제 정책의 관점으로부터 영외반출을 통제하기도 하고 원활한 거래를 위하여 다양한 규정을 설정하기도 하였으나 그 전제는 일단 조세로 들어온 물품의 유통이 아니라 직접 생산자를 비롯한 현지인들 손에서 상품으로서 유통시장에 투입된 것이었다.  원래 이 단계에서도 목면의 생산형태는 농가의 가내노동에 의한 부업적인 성격에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생산규모 및 시장에의 투입량을 마의 그것과 비교하여 보면 매우 방대한 양이 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마는 전술한 바와 같이 겨울부터 봄에 걸쳐서 자신들의 소비분도 포함하여 1호당 생산량이 높은 직포 능력을 가진 여자 한사람에 대해 기껏해야 3~5反정도였다고 추정된다. 그것도 에치고의 織布지역 같이 산지집중이 전채된 곳은 그만큼 전문화된 경우에 속한다. 이와 비교하면木綿織은 實綿으로부터 紡績하여, 직포하는 노동작업이 전반적으로 훨등하게 효율이 높았다


따라서 생산농가로부터 유통시장에 투입되는 목면포의 수량은, 대체로 가내부업적 생산형테를 취하면서도 횔씬 많았다. 또 그에 대한 수요도 사회분업의 진전, 도시소비시장의 확대 속에서 마의 경우보다도 휠씬 높았다.


(4) 경제구조의 변화


목면은 16세기무렵엔 일본 국내재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17세기 전반 무렵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용도도 군수용품적 성격에서부터 저마를 대신하여 서민들의 일상의복 재료로 변모하게 되었다. 더욱이 목면은 저마와 달리, 그 재배에서 가공까지 분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초기 목면업의 상품 경제적 성격은 주변 분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전반적으로 일본근세 사회 경제구조 변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藍作과 금비로서의 호시카(마른 멸치) 출어, 이에 따른 回船업 발달등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藍作의 발달-아와(阿波)지역의 藍(남=청색염료)생산


  藍은 고대이래로 저마에 사용되어온 염료이었으나 중세말기 그 수요가 증가하여靑苧의 생산증가와 더불어 상품생산화 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남의 상품화는 일본이 목면시대로 돌입하여 그 목면의 염료로서 각광을 받게 되는 이후, 종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목면의 경우, 紡績 ,직포 생산과정의 높은 효을성으로 인하여 생산성이 높아지게 되고 나아가 또 서민 의복로서의 소비가 증가하게 되자 그 염료인 남의 수요도 동시에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아와지역이 남의 주 생산지로 등장하게 되었다. 자급자족 및 기내지역에서의 일정한 상품수요를 충족할 생산은 종전부터 시행되어 왔으나 목면의 폭발적인 수요증가로 인하여 생산지 집중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아와번은 이미 蜂須賀씨가 입국한 이듬해인 天正14(1586)년 吳服屋 마타고로(又五郎)를 屋司로 임명하여 屋役을 징수하게 하고, 寬永2(1625)년에는 '藍方役所'를설치하고 있는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아와번의 재정과 관련된 중요 생산물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明曆~万治연간(17세기 중엽) 무렵. 현 도쿠시마겐 이타노군 아이스미마치(德島縣板野郡藍住町)를 중심으로 이른바 藍園28개촌이라 불리웠던 지역에서는 수백 町步에 걸쳐 藍밭이 형성되었으며 延室~元祿연간(17세기 후반)에는 다른 지역으로의 판매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正德3(1713)년 간행된 책에서는 아와에서 생산된 남의품질이 야마시로(山城), 셋즈 다음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생산량면에서는 아마도 에도시대 전반기부터 아와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게 많았던 주요산지 였다

 * 금비로서 멸치수요 증가와 어업기술 발달


  목면의 상품생산화는 그 생산 증대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던 비료, 즉 금비 호시카(干鑛)에 대한 급격한 수요증대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멸치수확을 위한 타국 출어가 발달하게 되었으니 동쪽으로는 치바현 九十九里○, 서쪽으로는 대마도해역에 이르는 멸치어업이 전개되었다 이와같이 마른 멸치는 목면재배 증가와 더불어 대량생산되어 오사카로 집적되었다.


  正德4(1714)년의 오사카(大板) 입하 상품에 대한 자료가 있는데, 그 입하량이많은 순서대로 살펴보면 米, 木綿류, 菜種, 材木, 멸치, 紙, 鐵의 순서로서 멸치는다섯 번째를 기록하고 있다.


한편 正德연간의 오사카에는 쇼코쿠 가이모노 돈야(諸國買物問屋)라 불리우는 지방별 니우케돈야(荷受問屋)를 비롯하여 주요상품의 집산기능 역할을 하는 상품별전문도매상이 널리 성립되어 각각 중간조직을 형성하고 있었다. ( 『大阪商業史資料』 )전문 도매상으로는 毛綿 도매상 18개, 木綿 도매상 9개, 繰綿도 나카마(정확한숫자 미상),각 지방 藍도매상 18개 藍玉도매상 9개 등과 더불어, 멸치도매상도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각 곳의 목면지대에서 상당한 분량의 전답에 목면재배를 하고 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볼 때 호시카의 수요급증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와지역 같은 藍作지대에서 필요하였던 호시카도 역시 오사카를 경유하여 공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목면업의 비약적인 발전은 藍作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나아가 그 생산증대에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호시카에 대한 수요도 급증시키게 되었다. 이와 같이 기축상품으로서의 목면생산과 발달은 연이어 다른 상품들의 상품생산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에도시대 중염 상품경제화의 물결 속에서 그 유통을 담당한 회선업도크게 발달하였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석문 내용

 1

本邦木綿機業成立의過程」 『日本産業發達史의硏究』 ,至文堂,1941

2

전 게 서 爭白素綠(綵인가)
採考布也 赤名木綿 木綿者木名也 在大唐 取此木之中綿織爲布 其色淨白也 大宋商客多所  持來 其色多染黃 雖然本色白也 (中略) 木綿J.此朝所焉(無)之‥‥‥

3

術定生, 「明代劣딴3木補』普及4L.」 ;西鳴定生, 「中國初期熊業H形成t를』構  造」 ;西定生, 「中國初期精業市場a考奈」 (모두 『中國經濟史硏榮교 에 소수),1966, 東京  人學出版會

4

목면의 경우, 조선에서는 木精이라는 글자를 사용한 데에 대하여 일본에서는 木綿이라는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경우 綿은 목면보다는 명주류를 일컫는 것 같다

5

古烏敏雄, 『日本農學史』 제1권, pp‥‥

6

淸良記』 (제7권 「親民鑑月集」 ( 『日本農業全書」 제10권 소수), pp. ,農漁山   -. 木鑛

   ÷月r)土用1=植3. 眞土 ?砂土 ?疑路tl吉. 萎』早(따. 五月雨r)內료』 L.危3 f ㄴo  業r)遲란性惡ㄴ. (뒤에 필요하면 후반부 넣을 것)

7

百姓信記

8

 백 성 전기 』 

9

木綿It作3法委Lf?Lf'(;t'美魚ㄴ 』物> 『農業全書』

10

永添慶二, 『新 ?木綿以前卵2 , 中公新書, 1990

11

李朝寶錄』 成化 6년 8월 已巳條

12

 朝鮮丁亥-應仁1: )年 而降 中原風塵 干伐團起 臣之○邑江(近江) 戰鬪...

13

安齋隨筆』 "우천시에는 대나무제 화승은 불이 끄지기 쉬우나 곤색으로 물들인 목면제 화승은 불이  끄지 않는다

14

「定書 栗屋太郎右衛門業」 『蒸霧鬪閱錄 七七』"-. 性今船憶 t約紅. 』色無紋之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