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씨 전래와 정천익(木棉事蹟과 正史의 차이)

성대 명예교수 민족문화추진회장 벽사 이우성(李佑成)

-1967년 3월25일 동아일보 발표 논문

우리는 면화(棉花)를 말할 때에 곧 문익점을 생각할 정도로 문익점은 유명하고도 널리 알려진 분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목면(木棉)의 종자를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가지고 와서 목면업 발달의 계기를 마련해 준 분이 바로 문익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면업의 발달은 종자의 전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후와 토양이 다른 데다가 재배의 방법도 아는 바 없었던 당시에 있어서 목면의 배양번식(培養繁殖)이 매우 힘드는 일이었을 것이고 배양번식이 성공된 후에라도 목면 씨를 골라 내는 것, 베를 짜내는 것, 등의 기구의 제작 및 기술적 과정이 모두 백지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지난(至難)의 작업을 거쳐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재작년 오월,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촌에 세워진 문익점의 면화시배사적비의 비문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목면화를 보고--그 종자(種子)를 필관(筆管)에 넣어 휴래(携來)---丁未(1367)2월에 환국(還國)하여 소거(所居)하시 배양리에 식수(手植)하니 처음은 토의(土宜)를 몰라 조습(燥濕)을 가려심고 그 영고(榮枯)를 보아 배양의 묘(妙)를 얻어 3년 만에 번성하여 드디어 전국에 퍼지니---후에 선생의 손 정헤공(靖惠公) 래(萊)는 소차를 만들어 문래(文萊)라고 이름하고 군수 영(英)은 직조(織造)의 요(要)를 얻어 이를 문(文)이라 하였는데 지금 와전되어 무명이라 부르니--- 즉 이 비문에서는 목면의 종자의 전래는 물론이고 그 배양번식이 모두 문익점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고 뿐아니라 소차, 직기(織機)등의 기구의 제작은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文萊)와 문영(文英)에 의해서 이룩된 것으로 말해 놓았다.
이것은 결코 이 비문의 찬자(撰者)가 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목면의 배양, 번식에서부터 직조(織造)의 보급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정천익의 공로임을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문익점이 실패한 목면의 배양을 정천익이 그 번식에 성공해낸 것이라든지, 지나가는 호승(胡僧)에게 성관(誠款)을 다하여 기구제작의 방법을 알아낸 것이라든지, 가노(家婢)에게 가르쳐 베를 짜내는데 성공해낸 것 등은, 모두 정천익의 뛰어난 지혜와 참담한 고심에서 나온 것이다. 더욱이 그는 사리사욕에서가 아니고, 오직 목면업의 보급에 힘을 써서 그와 같이 빠른 시일 안에 일국(一國)에 혜택을 입히게 되었으니, 그는 정말 국리민복에 헌신적 희생심을 가진 인인군자(仁人君子)가 아니면 안될 것이다. 정천익은 문익점의 장인으로 그의 생거지는 진주 사월리였다. 그는 전객령으로 치사(致仕)한 후에 고향에 돌아와 퇴헌이라고 호(號)하고 송죽(松竹)속에서 편안히 여생을 보냈다. 그의 사적은 그의 후손들이 편찬한 청계지에도 수록되어 있다. 지방 인사들은 그의 인품과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진주 서쪽 마동리에 청계서원을 세우고 향사(享祀)를 지내기도 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문익점을 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정천익도 망각(妄却)된 인물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정천익의 갸륵한 업적이 타인의 업적으로 오인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덮어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