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씨의 전래 우연이 아니다

김성준 수원대 사학과 교수

문익점의 목화씨 전래는 우연이 아니었다.
목면의 원산지는 인도로 기원전 8세기 께에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변경에는 일찍이 후한 때 광동이나 운남 지방에 전래하여 번이들에 의하여 재배되고 또 남북조시대에는 신강선 토로번의 고창국에서 재식한 기록이 보이지만 이것이 한인에 의하여 재배된 시기는 송대 부터로 보여 진다. 북송 신종(1068-1085)때 광동지방에 목면이 많아 토인이 다투어 길패포(吉貝布)를 짰다 하고 남송 이종(1224~1264)때의 기록을 보면 광동이나 해남도에서 물론 복건성 천주에서도 갈패포 또는 목면이 재배되어 면포를 생산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광동, 복건 등지에서 재배된 목면 또는 갈패포는 다년생의 목면생 즉 수면(樹綿)이었던 것 같아 보인다.

 

목면채취 지역에 대한 논란


그러면 일년생의 목면, 즉 초명은 어떤 경로를 밟아 중국에 전래 되었을까. 초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원 세조 때(1273) 발견된 농상집요로서 목면 재배법을 소개한 중국 최초의 문헌이다. 여기서 목면(초면)은 서역의 소산으로 근래에 협우(협서서부지역)에서 잘 자라고 번성하고 있는데 본토와 다름이 없다고 말한 것은 곧 목면(초면)의 동진 내지 북상을 점칠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므로 농상집요는 주로 화북지방의 농업에 관한 농서라는 점이 목면재배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하겠다. 목면의 동진 ,북상에 관한 자료를 좀 더 찾아보면 남송이 아직 강남을 지배하고 있을 때 강남땅에 초면을 많이 심고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또 농상집요보다 40년 뒤에 나온 왕정(王禎)의 농서에 의하면 목면종자는 본래 남해제국 소산이었는데 후에 복건의 여려 현이 모두 소유하게 되었다. 근래에는 강동, 협우 또한 많이 심어 잘 자라고 번성하고 있는데 본토와 다름없다.
원이 남북통일을 달성한 뒤 십 수 년이 지난 성종 때(1294~1307) 에는 강회, 협우, 천촉(사천)으로 퍼지고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황정은 초면이 남해에서 광동, 복건으로 다시 이곳에서 절강, 강소로 북상하여 온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지만 송,원 양국이 대립하고 있을 때 목면(초면)이 서역을 통해 협서 서부를 거쳐 본토에 전래됐다고 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와같이 강남(화남)에서 강북(화중,화북)으로 서역에서 협서 화북으로 목면의 보급이 확대되어 가오 있었던 송말 원초에 면작은 수익이 대단이 좋은 작물이었다. 때문에 원 세조는 중농정책의 일환으로 목면의 북진정책을 적극 추진하기 위하여 농상집요를 편찬 목면재배법을 자세하게 소개했던 것이다. 농상집요가 편찬될 13세기 중엽에는 연경부근에 아직 목면재배가 이우러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보다 1세기가 경과한 14세기 중엽의 공민왕대에는 이 지방에도 면화가 보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문익점은 경상도 산골에서 태어났다. 부친 숙선은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하지 않고 낙향했다. 상우당실기에 숙선은 총민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청간(淸簡)하여 청도선생(淸道先生)이라 칭했다고 한 것을 보면 당시 원 지배하에 혼탁하기 짝이 없던 정계에 몸담는 것을 기피하여 일찍이 고향(강성현)에 내려와 주경야독으로 조영히 세월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목면전래는 필연인가


문익점은 11세 때에 멀리 한산에 가서 이곡에게 사사했다. 또 20세 때 향거(鄕擧)로   성균관 경덕재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30세인 공민왕 9년(1360)에 문과에 급제했는데 정몽주,임박,이존오등과 동방이었다. 태조실록에 익점이 가업을 이어서 독서하여 공민 경자(9년)에 등과했다고 한 것은 곧 그가 주경야독하는 부친의 뜻에 따라 농사를 지으며 독서를 열심히 하여 가거에 급제했다는 말이된다. 따라서 문익점은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열중하는 한편 부친 밑에서 농사의 경험을 쌓았을 것이 틀림없다. 문익점이 이공수의 서장관으로 원에 사행하는 시기는 농상잡요가 편찬된 지 90년이 지난 때이며 왕정의 농서과 나오고 50년 뒤의 일이다. 13세기 후엽내지 14세기 초엽에 화중, 화북지방에서 이미 초면이 재배 되고 있었음은 이 두가지 농서를 통하여 확인된 바 있고 원세조 이후 목면의 북진정책이 꾸준히 추진된 것을 감안하면 이보다 연대가 많이 경과한 14세기 중엽의 공민왕대 연경 부근에도 면화가 재배 도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면화 경작 법을 처음 으로 소개 한 농상잡요는 간행되자 말자 고려에 유입되었을 것 같다. 그것은 농상잡요가 공민왕21년(1372)에 중간된 것을 보아도 짐작이 간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에 힘쓰는 한편 아버지 밑에서 농사에도 상당한 경험이 있던 그로서는 원에 들아가기 전에 농상잡요를 얻어 보았을 런지도 모르고 목면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었을 가능성도 점칠 수 있을 것 같다.  이와같이 농사에 남다른 관심이 있고 목면에 대해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던 그는 원에 들어가서는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왕정의 농서도 보고 목면에 대한 식견을 넓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연경지방에서 일찍부터 목면이 재배되고 있었던 것을 진작 눈여겨보고 있다가 공민왕 폐립사건이 해결되고 귀국하는 길에 그 씨앗을 몰래 적취해 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러므로 문익점이 길가에서 목면 씨를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당시 원에 숱한 사신들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목화가 유독 문익점의 눈에 뜨인 것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 평소에 농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