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 들어온 면화 600년 넘게 '옷감의 제왕'

 김한동 한국 교원대 교수

 

지금은 겨울철이 되면 여러 가지 원료로 만든 갖가지 따뜻한 겨울옷이 나오지만, 전통적으로 겨울옷의 대명사는 무명으로 만든 솜을 넣은 솜옷이었다. 무명의 원료가 되는 면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4세기 후반인 고려 공민왕 때였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 황제의 명을 거역한 죄로 귀양살이를 하던 문익점이 면화를 발견하고 귀국할 때 씨를 갖고 들어온 것이다. 문익점은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고향인 경남 산청에서 면화를 재배했다. 면화 재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남쪽 지방 전체로 확대됐다. 고려의 뒤를 이어 들어선 조선 정부는 면화 재배를 적극 장려했다. 평안도와 함경도를 적극적으로 개간한 세종 때부터는 북쪽 지방에도 면화의 재배를 장려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중부와 남부 지방은 물론 평안도 등 북부 지방 일부에서도 면화 재배가 활성화됐다. 


사람들은 면화로 무명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면화의 털로는 솜을 지어 사용했다. 그 이전에 평민들이 주로 입었던 것은 삼베옷이었다. 명주나 모시옷도 있었지만, 양이 충분하지 않아서 서민들이 입기에는 너무 비쌌다. 더구나 삼베는 속옷으로 입기에는 거칠었으며, 겨울에 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무명옷이 등장한 것은 의생활에서 획기적인 변화였다. 


이에 힘입어 15세기 중반부터는 기존의 삼베나 모시 등을 대신해 무명옷이 사람들의 주요 의복이 됐다. 평민들은 여름에는 홑겹으로 만든 옷을 입었으며, 봄과 가을에는 두 겹이나 세 겹으로 만든 무명옷을 입었다. 겨울에는 옷 속에 솜을 넣어 입었다. 무명옷은 이전의 옷에 비해 훨씬 따뜻해서 웬만한 추위에도 견딜 수 있었다. 면화는 옷을 만드는 원료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면화로 만든 옷감은 세금을 납부하거나 물건을 매매하는 데 이용됐다. 쌀, 돈과 더불어 유통경제의 주요 수단이었던 것이다. 


농가에서는 농사일이 없을 때 부업으로 면화로 옷감을 짰다. 조선 후기 들어 면화로 옷감을 짜는 수공업은 농촌사회에 상당히 널리 퍼졌다. 그러나 개항 이후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외국산 면제품이 들어오자 국내 농촌의 면직업과 면화 생산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일제 통치시기에 접어들면서 국내에서 생산되는 면화도 우리나라 재래종에서 방직공업에 적합한 서양의 대륙면으로 바뀌어 갔다. 1930년대 일제는 식민통치정책의 일환으로 한반도를 일본의 병참기지로 이용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공업 원료 증산정책으로 남면북양정책을 폈다. 남쪽에서는 면화의 생산을 늘려 면직물 공업을 육성하고, 북쪽에서는 양을 키워 모직물 공업을 육성하고자 한 것이었다. 


해방 이후 합성섬유인 나일론이 들어옴에 따라 무명옷은 차츰 자취를 감추어 갔다. 이불에 사용되던 솜도 나일론 계통인 가볍고 따뜻한 캐시밀론에게 그 자리를 빼앗겼다. 그러다가 나일론 옷이 몸에 해롭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면화를 원료로 하는 제품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