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가도 한없는 목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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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군 겸면천 뚝방길

이 꽃이 목화 꽃 이란다!. "얼매나 반가운가 몰라, 얼매나 고마운가 몰라" 겸면천 제방길 따라 끝 모르게 이어진 목화길에서 만난 동네 어르신은 그 꽃 만나 반갑다는 말을 노래 가락 처럼 하신다. 

 "이 꽃을 어디서 볼 것이여. 인자 영 잊어뿐 줄 알았네" 그저 꽃 한 가지 다시 보게 된 흐뭇함만은 아닐 터이다. "꽃만 이쁘가니. 흑허니 솜이 달리믄 그것이 더 볼만허네."

 '목화' 하면 누구나 문익점이라는 이름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에 갔던 그이가  어렵사리 붓대롱 속에 목화씨를 숨겨 들여온 그 이야기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때 밭을 지키던 노파가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목화 몇 송이를 땄더라는 그 장면까지 실감나게 전해지는 이야기다. 오늘날로 치면 '국제종자스파이'인 셈이나 그의 공로는 훗날 조식이라는 선비로부터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라는 시를 지어 받을 정도로 칭송되었다. '외유'중에도 그 나라 사람들 입성이 반반한 것을 보고는 헐벗은 백성을 생각한 공무원이니 그만한 치하를 들어 마땅한 일일 터이다.


종자만 들여왔다고 옷이 될 일인가. 재배기술을 몰라 겨우 한 그루만이 살아남았으나 3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 온 나라에 목화씨가 퍼지게 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이의 집념이다. 게다가 목화에서 씨를 없애고 실을 뽑는 것을 궁리하다 마침내 장인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원나라 승려에게서 씨 빼는 '씨아'와 실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알아내 베를 짤 수 있게 한 것도 그이의 공이라 한다.


혹은, 실을 뽑는 도구를 실제로 만든 사람은 사실 문익점이 아니라 그의 아들 문래여서 그 도구가  '물레'이고, 그 손자 문영이 베를 짜는 법을 고안해 내서 그 베가 '무명'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로부터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몸을 감싸는 옷이 돼 온 귀한 농작물이 바로 이 목화다.

그러나 목화는 1970년대 이후 값싼  수입 원면과 화학섬유에 밀려나  재배면적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 1980년대 이후에는 목화밭을 구경하기조차 어렵게 되고 말았다.

 "옷만 해 입었가니. 이불 맨들어서 따숩게 덮기도 허고..." 딸 시집보낼 작정이 서면 밭귀퉁이에 꼭 심어 거뒀다는 그 '미영솜'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오래 덮다가도 투둑투둑 두들겨서 햇볕에 말리거나 다시 타 주면 새 솜처럼 보송보송 해지는, 요샛 사람들 좋아하는 '천연솜'이다.


 "이것을 또 묵기도 솔찬히 묵었네. '미영다래' 묵을라고 침께나 생켰제." 목화꽃 지고 나면서 달리는 게  다래다. '떨떠름허기도 하고 달큼허기도 한' 그 맛이 무어 그리 맛났을까만,  끼니 잇기 어렵던 시절이었으니 눈으로 드는 호사보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맛이 더 귀했을 법도 하다. 그 귀한 꽃길이 십리나 이어진다.

꽃을 머금은 불꽃 모양의 초록 이파리, 이제 막 피어난 하얀 꽃, 피어난 지 좀 지나 연분홍 꽃, 더 지난 건 진분홍 꽃,

시드는 빛마저 고운 자줏빛 꽃... 가도가도 한없이 계속되는 목화꽃길을 걷는다.  속으로 채곡채곡 덕을 품은 사람을 만나는 듯한 꽃길이다. 

이 꽃들 지면서  다래 달리고, 다시 거기에 하얀 솜꽃들 피어날 것이니 다시 찾아올 기약을 해보는 꽃길이다.